[CEO & 매니지먼트] 박철곤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 詩 낭송하는 CEO
박철곤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57)이 선창하는 건배사는 언제나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다. 술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에 따라,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건배사가 달라질 법도 하지만 그의 건배사는 매번 그대로다. "저와 함께 일해봤거나 제 살아온 얘기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이 건배사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있을 겁니다. "
신문 배달을 하며 고학을 하던 어린 시절부터 공기업 사장으로 일하는 지금까지 그의 생활신조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하자'다. 살고 있는 이 순간을 즐길 수 있으면 인생의 행복과 성공도 저절로 뒤따라온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행정의 달인''총리실 해결사'란 별명을 갖고 있는 박 사장은 27년의 공직 생활 중 23년을 총리실에서 보냈다. 차관급인 국무차장까지 지내고 올해 전기안전공사 사장에 취임,국민의 공복에서 기업 최고경영자(CEO)로 제2의 인생길을 걷고 있다. 규제개혁 업무를 주도한 국정 운영의 경험을 살려 성과 중심의 '주식 시장형 인사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공기업 혁신에 나서고 있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진학

박 사장의 고향은 전북 진안 백운면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버스를 처음 보고 신기해했을 정도로 외진 산골에 살았다. 가난한 집안의 4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일제 시대 강제징용을 당해 몸을 다친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남의 밭일을 하며 7남매를 키웠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공부는 읍내에 소문이 날 만큼 잘했다고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학비를 면제해주는 전주의 한 사립 중학교를 찾아 입학했지만 가난의 설움은 끝나지 않았다. 재건학생회비(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밀리자 학교 서무과 직원이 시험 시간에 갑자기 들어와 시험지를 빼앗았다. 학비 면제 조건에 성적 유지가 포함돼 있었는데 시험을 못 보게 됐으니 학교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신문배달,막일을 닥치는 대로 하며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고학을 하는 5,6명이 함께 얻은 작은 방에서 쪽잠을 자며 얻은 검정고시 자격증을 갖고 부산진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때부터 막연하게 국가공무원이 되는 고시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방송통신대 행정학과를 다니다 한양대 행정학과에 3학년으로 편입,졸업과 동시에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끼니 굶을 걱정 없이,잘 곳 걱정 없이 공부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때였습니다. 나라를 위해 일하라는 부모님 말씀을 따르기로 한 거죠.지금 돌아보면 가난이 오히려 저를 일으켜세운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

지금도 검소한 생활이 몸에 뱄다. 2008년 국무차장 시절 관보에 재산으로 1억8902만원을 신고해 당시 차관급 중 재산이 가장 적었다. 95년식 프린스와 98년식 세피아 등 15년이 넘은 차를 부인과 번갈아 몰고 있다.

◆사스 대책 주도한 총리실 '맏형'

박 사장은 행시 25회로 총무처 소청심사위원회 행정사무관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행시 동기 중에는 이채필 고용노동부 장관,최수현 금융감독원 수석부원장 등과 친하다. 그는 국무조정실 복지노동심의관,총괄심의관,심사평가조정관을 거쳤고 2005년 규제개혁조정관을 맡으며 정부 규제개혁 작업을 실무적으로 뒷받침했다. 공직 생활의 대부분을 총리실에서 지낸 데다 한번 손대는 업무는 끝을 보는 성격 때문에 '총리실 해결사'로 통했다. '먹거리 안전확보 태스크포스'와 '기후변화 대책 기획단' 등 굵직굵직한 국정 현안을 해결하는 조직을 총괄 운영했다.

박 사장이 총리실 재직 시절 가장 보람있게 생각하는 업무는 2003년 사스(SARS · 중증호흡기증후군)대책이다. 당시 복지노동심의관이었던 그는 사스 공포가 세계적으로 확산되자 총리실에 종합상황실을 만들고 관련 부처 관계자들과 밤낮으로 대책 마련에 머리를 맞댔다. 박 사장이 생각해낸 사스 해법은 대당 3000만원에 달하는 휴대용 열감지 카메라였다. 해외 감염자의 국내 입국을 사전에 막기 위해 국내 공항에 착륙한 비행기 안으로 검사관이 직접 열감지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 체온 변화를 보이는 감염 의심자들을 골라냈다.

일부 부처에선 10대의 열감지 카메라를 구입하는 비용과 외교 문제를 이유로 들어 반대했지만 박 사장은 특유의 뚝심으로 밀어붙였다. "관련 부처들이 발빠르게 움직여 만든 대책 때문이었는지 국내에선 사스로 사망한 사례가 한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올해 초 구제역 파동을 보면서 부처 간 손발이 맞지 않아 사태가 커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

◆시 낭송하는 CEO

그는 지난 6월1일 전기안전공사 사장에 취임했다. 전기안전공사는 전봇대에서 일반 가정,빌딩,공장으로 들어오는 전기의 고장과 안전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전력 생산과 공급은 한국전력과 발전자회사들이 맡고 있지만,전기설비 점검 및 응급조치 등 실질적인 사후 관리는 전기안전공사의 업무다. "총리실 업무가 포괄적이고 다소 추상적이었던 반면 이쪽 분야는 국민과 직접적인 접점을 갖고 있어 더 부담되고 책임감을 느낍니다. 국정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국민과 기업에 만족을 넘어 감동을 주는 서비스를 제공할 겁니다. "

그는 취임 100일을 맞아 지난 8일 '전기안전 선도기업,행복한 고객,신명나는 일터'라는 3대 미래비전을 제시했다. 한국형 전기안전 관리시스템을 국제 경쟁력을 갖춘 상품으로 개발,신흥시장국에 수출하는 계획도 세웠다. 전기안전공사는 2005년 세계 최초로 전기를 끊지 않고 전기설비를 검사하는 무(無)정전 검사 기술을 개발해 지난 7월부터 산업 현장에 본격 적용하고 있다. 대형 제철소 등 100개 국가 주요 산업시설을 대상으로 무정전 검사를 실시하면 연간 5340억원의 정전 손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무정전 검사기법 등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 있는 기술을 개도국에 수출해 전기안전 한류(韓流)를 전파해 나갈 겁니다. "

박 사장은 '시낭송 CEO'로도 명성을 얻어가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실려있던 시를 외우던 게 버릇이 돼 지금은 암송하는 시가 수백 편을 넘는다. 직원들과의 모임이나 술자리에서 상황에 맞는 적절한 시를 낭송해 흥을 돋우곤 한다.

◆'블루칩 인재'발탁시스템 마련

박 사장이 취임 후 도입한 '주식시장형 인사시스템'도 주목을 끌고 있다. 블루칩(우량주)에 더 높은 가격이 매겨지고 수요자들이 몰리는 것처럼 간부들에게 신망과 평판이 좋은 인재를 팀원으로 뽑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처장은 같이 일할 부장을,부장은 같은 부서에서 근무할 차장을 직접 선발하는 방식이다.

"학연 지연으로 진흙 속에 묻혀 있는 우수 인재들을 업무 일선으로 끌어내기 위한 조치입니다. 저 역시 끈 같은 건 없었지만 묵묵히 일하다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성과에 대한 보상체계를 마련하고 열심히 일한 사람이 우대받는 기업 문화를 조성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봅니다. " 박 사장은 대신 업무성과에 대한 평가와 책임도 철저히 물을 방침이다.

△출생-전북 진안

△학력-한양대 행정학과,전주대 법학박사,서울대 최고경영자 과정

△가족-부인과 1남1녀

△경력-국무조정실 총괄심의관,복지노동심의관,일반행정심의관,외교안보심의관,국무총리실 국무차장(차관급)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