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성 차별을 막기 위해 2009년(2010년 예산편성) 도입한 '성인지(性認知) 예산제도'가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성인지 예산의 기본 취지인 성차별 개선과는 관계없는 사업들이 상당수인데다 성별 기본통계나 정책목표가 부실한 정책도 많았다. 정부가 겉으로만 양성 평등을 내세우면서 내용은 제대로 못 채워 성인지 예산제도가 전시행정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상 사업 마구잡이식 추천

정부가 이달 들어 국회에 제출한 '2012년 성인지 예산서'에 따르면 내년도 성인지 예산 대상사업은 총 34개 기관의 254개 사업이다. 예산 규모는 10조7042억원으로 지난해(10조1749억원)에 비해 외형상 5.4% 증가했다.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사업별 성과목표 설정의 구체적 근거를 제시하는 등 예산의 실효성을 높이는 데 중점을 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254개 사업 중 양성 평등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업만 20개가 넘었다. 국토해양부가 추진하는 저상버스도입보조 사업이 대표적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차체가 낮고 계단이 없는 저상버스 사업을 통해 여성 권익을 도모하겠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성과 목표는 '전국 시내버스 도입비율 20%'로,성 차별 개선과 전혀 상관이 없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추진하는 '인권교육 활성화'도 성 차별 문제와 직접 관련이 없는 정책이지만 내년도 성인지 정책 항목에 포함됐다.

외교통상부의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 국가원조(ODA)',통일부가 추진하는 '북한이탈주민 정착금 지급',국방부의 '비상시 국민행동요령' 등의 정책도 성인지 사업과 관련없는 건 마찬가지다. 농촌진흥청의 농작업재해예방 사업은 여성권익 보호를 취지로 내걸면서 정작 성과목표는 '남성수혜 비율 50%'로 세우기도 했다.

홍현주 여성부 성별영향평가 과장은 "해당 정책이 양성 평등과 관련된 정책인지에 대해선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성인지 정책 중 양성 평등 개선을 위한 정책은 실상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여성부 관계자도 "각 부처 예산담당자들이 성인지 사업에 대한 관심이 매우 부족하다"며 "성인지 사업과 관련없는 정책이 많은 건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제도에 대한 관심이 없다보니 아무 정책이나 대상 사업에 마구잡이식으로 추천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정부의 추진 의지도 부족

예산 현황 및 사업 대상자 · 수혜자에 대한 성별통계도 부실했다. 전체 254개 사업 중 통계 수치가 제대로 나오지 않은 정책만 40여개에 달했다. 정책이 성 차별 개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기초 조사도 제대로 돼 있지 않은 것이다.

여성부 관계자는 "제도가 도입된 지 3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며 "앞으로 부족한 부문을 점차 개선해 나갈 계획"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제도에 대한 지적은 도입 첫해부터 국회와 여성계를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 때문에 정부의 성인지 예산제도에 대한 의지가 부족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성인지 예산제도는 기획재정부의 총괄아래,각 부처 예산담당자 교육은 여성부가 맡고 있다. 재정부에선 문화예산과 소속 사무관 1명이 정부 모든 부처 예산을 총괄한다.

여성부 담당자도 2명에 불과하다. 재정부 관계자는 "각 부처에서 올라온 수백개의 정책을 혼자서 검토하기엔 무리가 있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성인지 예산제도는 내년부터 지방자치단체에 확대 실시될 예정이다. 중앙정부의 관련 예산이 건성으로 편성되는 와중에 각급 지자체가 이 제도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지 회의적인 지적도 나온다.


◆ 성인지(性認知)예산제도

예산집행 과정에서 남녀별로 미칠 영향을 분석해 국가예산이 양성평등하게 배분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제도.국내에선 국가재정법에 따라 2010회계연도부터 도입됐다. 전 세계 70여개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다.


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