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폭풍전야' 제약업계
"동아제약은 제약업계 1위인데 연매출 9000억원이다. 화장품 만드는 아모레퍼시픽은 1조5000억원이나 되는데 이게 말이 되는가. "

지난주 보건복지부와 제약업계가 약가 인하 방안을 놓고 1박2일 합숙토론을 벌일 때,정부 당국자가 제약사를 질타하면서 던진 발언이다. 제약사들이 오죽 못났으면 연매출 '1조원 기업' 하나 못 만들어내느냐는 비아냥이었다.

제약사 임원들은 속으로 원통함을 삭여야 했다. 신약 하나 만드는 데 평균 14~15년이 걸리고,10년 동안 투입되는 연구 · 개발(R&D) 비용만 3000억원이 넘는 제약업의 특수성을 간과한 채 결과만 비교한 당국자에게 서운함을 넘어 분노를 느꼈다는 게 참석자들의 전언이다. 정부가 내년 1월1일부터 약값을 평균 17% 깎겠다는 '8 · 12 약가인하' 방안을 발표한 지 2개월 만에 뒤늦게 업계의 입장을 듣겠다며 마련한 자리에서다.

정부는 조만간 정부안을 그대로 입법예고할 예정이다. 입법예고는 법적으로 말뚝을 박는 것이다. 한번 공표되면 법을 다시 바꾸기 전에는 되돌리기 어렵다. 제약업계는 전면적인 약가 인하를 앞두고 폭풍전야처럼 뒤숭숭하다.

지난해 연매출 1500억원대의 한 중견제약사 대표는 "줄어드는 약값 마진을 제약업체와 유통업체가 어떻게 '고통분담'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다"며 "의약품 도매 재고(물량)가 2조원이 넘는데,내년부터는 재고가 넘쳐도 (손실 때문에)일반 약국에 약을 공급하지 못하는 '의약품 유통 대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사는 약가 인하 이후의 제품 · 수익구조를 시뮬레이션해봤더니 내년 매출이 280억원 정도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회사 관계자는 "손발이 잘려나가는 상황인데도 아프다고 소리칠 수 없는 처지"라고 말했다.

제약협회 측은 내년도 업계 전체 손실을 2조9000억원으로 추산했다. 제약업계 전체 매출은 한 해 12조원 정도다. 1년에 3조원을 고스란히 깎이게 되면 매출 규모는 10년 전으로 뒷걸음질치게 된다.

올해 정년퇴직을 앞둔 한 제약사 임원은 "2015년이면 건강보험재정 적자가 5조원 정도 생긴다고 하지만 산업이 죽으면 정책도 의미 없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