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30세, 그리고 기다림
Y형! 오래전 어느 해 이맘때인가 봅니다. 백담사에서 용대리로 나오는 긴 단풍계곡을 함께 걷던 기억 납니까? 새빨간 단풍이 어찌나 아름답던지요. 그날 Y형이 웃으며 한 말,"우리도 이제 '물'에서 '흔'으로 넘어가는 나이네." 맞장구를 치면서도 순간 가슴이 먹먹해오던 생각이 납니다. 오랜만에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30세'를 꺼내 들추어 보았습니다. Y형과 같이 그 책을 읽고 그의 치열한 언어를 침 튀기며 예찬하던 날들이 우리에게 있었지요.

바흐만은 30세의 심리적 탈각(脫殼)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억의 그물을 던진다. 자신을 향해 그물을 덮어씌워 자신을 끌어올린다. 어부인 동시에 어획물이 되어 그는 과거의 자신이 무엇이었던가를,자신이 무엇이 되어 있었나를 보기 위해 시간의 문턱,장소의 문턱에다 그물을 던지는 것이다. '

그 시절 Y형은 자신이 무엇이었다고 기억하세요? 나는 내 30세의 막이 오르던 시절,내 자신이 자유가 종식된 아웃사이더가 되어버린 한 그루의 미루나무였다고 기억합니다. 그리곤 줄곧 신작로의 희뿌연 먼지를 뒤집어쓰고 버티며 그 앞을 지날 마음 따스한 여행자를 기다리는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30세라는 피할 수 없는 해저드를 건너옵니다. Y형도 좋아하는 최영미 시인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마침내 그도 갔지만/…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최영미,'서른,잔치는 끝났다')라고 썼습니다.

당시 서른살 정직한 그 시인은 1980년대 분노와 좌절의 세상에서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이란 해저드를 건너고 나서 대체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스스로 시집 후기에 썼듯이 지상에서의 사랑이 어디까지 아름답고 추할 수 있는지 다 보여주고 떠난 그를 그래도 잊을 수 없어서였을 것 같습니다.

Y형,나는 주말이면 아무도 없는 텅 빈 사무실에 나와 김광석을 크게 틀어놓고 무연히 앉아있곤 합니다. "조금씩 잊혀져 간다/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또 하루 멀어져간다/…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 (김광석,'서른 즈음에') 정확히 서른둘에 이 세상을 황망히 떠나버린 그는 바흐만의 '기억의 그물'을 어디에다 던져놓았길래 비어가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음을 슬퍼했을까요?

Y형,언젠가 내게,우리는 이 풍진 세상에 운 좋게 살아남아 어느날 바람에 실려올 어떤 사랑이라도 기다리고 있는데,훗날 그것마저 끝나고 나면 대체 무엇을 기다리며 살게 될까 물으며 눈물이 그렁그렁 하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아마도 미루나무처럼 살아남아 또 다른 찬란한 모습의 여행자를 기다리고 서 있을 거라고 답하고 싶었습니다. Y형,찾아올 이는 소식도 없는데 대책없이 맞아들인 이 가을을 도대체 어쩌란 말인지요.

한지훈 < 이노패스인터내셔널 대표이사 jhhan@innopathint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