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KBS교향악단 '나가수'에서 배워라
KBS교향악단의 연주를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4년 전 여름이다. 접하기 쉽지 않은 말러 교향곡 3번을 연주한다고 해서 예술의전당을 찾은 기억이 있다. 함신익 미국 예일대 교수가 객원지휘를 맡았다. 지금은 상임지휘자로 단원들과 맞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말러 3번의 첫 악장은 호른 합주 팡파르로 시작된다. 6악장 가운데 가장 길고 광대해 연주하기가 쉽지 않다는 악장이다. 그래서 수준급 오케스트라도 출발이 뒤뚱거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그날 공연도 그렇게 시작됐다. 문제는 뒤뚱거림이 초반에 멈추질 않았다는 점이다. 이 곡의 연주시간은 100분에 육박한다. 지휘자 탓인지,연주자 탓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클래식 초심자의 말러 탐색전은 지루하고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말러 3번을 다시 만난 것은 지난해 연말이었다. 이번엔 정명훈의 서울시립교향악단이었다. 연주 실력에 한껏 물이 올랐다 해서 일찌감치 전석 매진된 연주회였다. 그래서였을까. 공연은 가슴 벅찬 감탄의 연속이었다. 현악기와 관악기의 기막힌 앙상블도 놀라웠지만,공연 뒤 그 많은 사람들의 기립박수는 처음 느껴보는 감동이었다.

사실 서울시향은 KBS교향악단에 비해 늘 한 수 아래라는 평가를 들어왔다. 5~6년 전만 해도 그랬다. 그런 평가가 단기간에 180도 뒤집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시향의 성과는 눈부시다. 공연 횟수부터 크게 늘었다. 지난해에는 136회나 됐다. 법인으로 재출범하기 직전인 2004년의 61회보다 2.3배 늘어난 것이다. 2만명에 불과했던 관람객이 19만명 수준으로 늘었고,자체 수입도 1억4000만원에서 42억6000만원으로 30배 넘게 급증했다. 질적 성장도 주목할 만하다. 일본 NHK교향악단을 넘보는 수준이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무엇보다 객관적인 평가가 있다. 도이체그라모폰과 장기 음반발매 계약을 맺은 것이다. 아시아에서는 처음이다. 도이체그라모폰은 EMI와 더불어 세계 최고의 음반사다. 음반에 붙은 이 회사의 노란색 레이블은 이미 시향이 세계적 오케스트라가 됐다는 인증서나 다름 없다.

서울시향의 변신은 2005년 법인화와 함께 경쟁시스템을 도입한 덕분이다. 결코 순탄치는 않았다. 정명훈 예술감독이 모든 단원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단원들의 반발은 지금의 KBS보다 더 심했다. 단원들은 신자유주의의 망령이 문화계에까지 침투했다며 거리로 뛰쳐나갔지만 그대로 밀어붙였다. 첫 오디션에서 기존 단원 96명 가운데 35명을 탈락시켰다. 국내 연주자의 실력이 부족한 부분은 해외에서 보충했다. 오디션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KBS교향악단은 오랜 내홍을 겪고 있다. 단원들이 함 교수를 자격 미달자로 규정하고 단체 행동에 나서 최근엔 공연마저 차질을 빚고 있다. 이유는 역시 오디션이다. 이 악단의 급여는 일반 직장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 게다가 1주일에 8시간까지 출강할 수 있다. 개인 레슨은 아예 노터치다. 정년은 61세다. 천국 같은 직장에 경쟁을 요구하는 게 불만인 셈이다.

함 교수는 대전시립교향악단을 6년간 맡았을 때도 같은 일을 겪었다. 명성이 올라가고 처우도 개선됐지만 끝없는 경쟁이 싫다며 단원들이 반발한 것이다. 함 교수는 "한국의 오케스트라는 잘하든 못하든 똑같은 대우를 받으려는 사회주의 불치병에 걸렸다"는 쓴소리를 남긴 채 미국으로 떠났다.

물론 함 교수의 오케스트라 운영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건 누가 봐도 경쟁을 기피하는 단원들이 문제다. 함 교수는 얼마 전 홈페이지에 MBC의 '나는 가수다'를 본 소감을 띄웠다.

"오늘의 1등이 7등으로,어제의 7등이 1등이 되는 치열한 경쟁이 현실입니다… 이제 다음 세대의 관객을 확보하기 위한 처절한 경쟁에 들어가야 합니다… 목숨 걸고 연주해야 합니다…그것을 다시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가수."

김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