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ㆍ시민운동가 거쳐 서울시청 입성…네거티브 검증 뚫었다.

10ㆍ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박원순 당선자는 정치 초년생이지만 단순히 `초보'로 분류하긴 어렵다.

정치권에서 직접 활동한 적은 없지만 오랜 시민운동을 통해 정책을 다룬 경험은 어느 정치인 못지않게 풍부하다.

진보적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는 `행정가 박원순' 탄생의 산파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변호사에서 시민운동가로 = 박 당선자의 시민운동은 1994년 그가 주도적으로 설립한 참여연대가 출발점이다.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1991∼1992년 영국과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담배 소송'같은 생활밀착형 시민운동에 눈을 뜨고 참여연대 활동의 밑거름이 된 방대한 자료를 싸들고 귀국했다.

여기에다 변호사, 대학교수, 시민운동가 등이 주축이 돼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시스템과 활동영역을 구축함으로써 참여연대는 정당에 버금가는 `정책 공장'이 됐다.

주요 활동만 살펴봐도 국민생활 최저선운동(1994년), 사법개혁운동(1995년), 소액주주운동(1998년), 예산감시 정보공개운동(1999년), 낙천ㆍ낙선운동(2000년), 휴대전화요금 인하운동(2001년) 등 기존 시민운동 영역과는 다른 낯설지만 신선한 주제들이었다.

사회적 논란도 적지않아 낙선운동 당시 그는 법조인 출신이지만 "악법은 법이 아니다"고 했고, 이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벌금 50만원의 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참여연대 이후 그는 `아름다운가게', `아름다운재단'으로 활동 보폭을 넓혀갔다.

◇인생 바꾼 `오둘둘 사건' = 박 당선자는 1956년 경남 창녕군에서 태어났다.

면소재지에서 20리 길을 걸어 들어가는 농가에서 2남5녀의 여섯째였다.

유년 시절 "못 말리는 개구쟁이 노릇"을 해 이른 나이에 초등학교에 보내진 `덕분'에 그는 고등학교(경기고)와 대학(서울대 사회계열)을 갈 때 한 번씩 재수를 했지만 19살에 대학생이 됐다.

그가 대학에 입학한 1975년은 격변기였다.

4월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조치에 격분한 서울대 농대생 김상진씨가 할복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달 22일 서울대생 주도로 열린 김씨의 장례식은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고, "돌멩이 몇 개 던진" 박 당선자를 포함한 60여 명의 학생이 구속됐다.

이른바 서울대 `오둘둘(5월22일) 사건'이다.

그는 영등포구치소에서 4개월여를 복역하다 기소유예로 풀려났지만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미 서울대에서 제명된 뒤였다.

훗날 그는 감옥생활에 대해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고, 법조계에 발을 들여놓고 시민운동에 뛰어들 결심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1978년 8월부터 8개월간 고향에서 보충역으로 복무하고 법원 사무직시험에 합격, 춘천지방법원 정선등기소장으로 근무했으나 채 1년이 안 돼 그만뒀다.

곧이어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박 당선자는 1979년 장충식 당시 단국대 총장이 신원보증을 서 줘 간신히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한다.

서슬 퍼런 시절, 데모를 하다 복역까지 한 학생을 받아주는 대학은 없었다고 한다.

그는 그 인연으로 장 총장을 그의 결혼식 주례로 모셨다.

1982년 검사 임용과 함께 대구지검으로 발령받았으나 1년 만에 사표를 던지고, 이듬해 변호사로 변신한다.

첫발을 디딘 곳이 바로 `인권변호사의 전설'인 고(故)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이었다.

박 당선자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 미국 문화원 사건, 한국민중사 사건, 말지(誌) 보도지침 사건, 서울대 성희롱사건 등을 맡아 현대사의 중심에 섰다.

그는 하지만 `돈 되는 사건'도 맡아 "돈을 꽤 잘 벌었다"고 했다.

그는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 개소에 재정적으로 큰 기여를 했다.

◇`네거티브' 검증 뚫고 우뚝 = 지난 8월 24일 백두대간 종주 도중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으로 서울시장 보선이 예정되자 박 당선자는 서둘러 하산했다.

출마 선언 직후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그의 지지도는 5%. 정치 초년생치고는 낮지 않은 지지율이었지만 그는 인지도의 한계를 절감했다.

이 대목에서 "가치를 공유하는 사이"인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천군만마가 됐다.

무려 50%대의 지지율로 고공비행하던 안 원장은 `아름다운 양보'로 그를 밀어줬고, 선거 막판 한나라당의 네거티브 공세로 휘청거릴 때 다시한번 원군으로 나서 젊은층과 중도층의 표심을 껴안게 도와줬다.

하지만 그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병역 기피를 위한 `호적 쪼개기' 의혹, `서울대 법대 학력 및 단국대 특혜' 등 학력 의혹, 아름다운재단 대기업 기부금 논란 등으로 큰 내상을 입었다.

선거 사상 유례가 없는 네거티브 공방을 지켜본 서울시민은 `안정'보다는 `변화'를 선택했고, 오세훈 전 시장의 사퇴로 남은 2년8개월의 임기를 그에게 맡겼다.

(서울연합뉴스) 강영두 기자 k0279@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