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프리즘] '슈퍼 정부'라는 미신(迷信)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지나치게 '솔직한' 화법(話法)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많았지만,그만큼 소신이 분명한 정치인이었다. 언론사 경제부장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기업 투자 활성화 및 출산장려정책에 관해 털어놓았던 얘기가 특히 기억에 남아 있다.

"규제 좀 풀고 세금혜택을 준다고 해서 기업들이 안 해도 될 투자를 할 것 같습니까? 기업은 돈이 될 것 같으면 아무리 규제를 해도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투자할 것이고,전망이 안 보이면 어떤 유인책을 내놔도 지갑을 열지 않습니다. " "보육시설을 늘리고 육아비용을 보조해주면 않는 것보다야 출산을 늘리는 데 도움은 되겠죠.하지만 그게 본질적인 해법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세상 참 살 만하다고 느껴야 자식을 더 낳지 않겠습니까. "

그렇다고 해서 노무현 정부 때 투자활성화와 출산장려정책이 없지는 않았다. "우리 경제의 핵심 현안에 아무런 조치도 안 내놓으면 언론에서 '조지니까',또 않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대책을 시행하기는 한다. 하지만 정책 효과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 이게 노 전 대통령의 솔직한 토로였다.

기업이 투자해야 일자리가 늘어 청년실업문제가 개선되고,출산 감소를 막아야 '북핵보다 더 무섭다'는 경제활동인구 축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노 전 대통령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대증(對症)적인 요법으로 문제의 근원을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게 그의 고민이었다.

그가 지지기반인 좌파 정치인과 시민단체의 반발을 무릅쓰고 한 · 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결단한 이유였다.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과 하루라도 빨리 확고한 공동시장과 경제동맹을 구축해야 기업들의 판로(販路)가 넓혀지고,투자 확대와 국민 삶의 질 향상이라는 선순환 고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한국이 전쟁의 잿더미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강국 반열에 오른 것은 글로벌 자유무역의 흐름을 잘 활용한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꿰뚫고 있었다. 지속가능한 성장과 일자리 창출에 자유시장경제만한 묘약이 없다는 걸 그는 확신했다. 노 전 대통령이 한 · 미 FTA 반대세력을 향해 "나는 좌파 신자유주의자"라고 일갈했던 이유다.

지난 '10 · 26 재 · 보선' 결과는 정치권에 전례없는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서울시장 선거 승리라는 '대어(大魚)'를 낚은 좌파 정당들은 여세를 몰아 "사회적 약자들을 질식시킬 한 · 미 FTA 저지"를 최우선 정치 아젠다로 밀어붙이고 있다. 걱정되는 건 한 · 미 FTA만이 아니다. 내년 주요 선거를 앞두고 좌파 야당은 물론 집권 한나라당조차 재정을 동원한 '복지 확대' 정치상품을 내놓기에 바쁘다. 지난 선거에서 드러났듯 줄어드는 일자리와 소득격차 확대,치솟는 물가에 분노한 표심(票心)을 달래고 끌어안기 위해서다.

하지만 자유시장 기능을 억누른 채 재정만으로 일자리를 늘리고,분배를 개선하고,물가를 끌어내릴 요술방망이는 없다. 세계 역사에서 그런 공약을 내걸었던 정치 지도자는 셀 수 없이 많았지만,에둘러 말할 것 없이 '대(對)국민 사기극'으로 끝났음은 따로 설명이 필요없다. 성장 · 분배 · 물가안정을 위해서는 모두의 고통 분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말할 용기가 필요하다. 그게 정치 지도자의 금도(襟度)다.

이학영 편집국 부국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