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서 자취 1년…노래 40곡이 내게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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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세 린드 새 음반 한국 독점 발매…4일 홍대 상상마당서 단독 공연
한겨울 숲속을 휘감는 바람처럼 서늘한 멜로디,얇은 유리처럼 금방이라도 깨질듯한 목소리의 스웨덴 뮤지션 라세 린드(37).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깊고 푸른 눈을 반짝이며 그가 홍대 앞 카페로 걸어들어왔다. 한손엔 아이스크림,다른 손엔 기타를 들고 있다. 어제 막걸리를 마셔서 '해장'이 필요하다는 그는 커피 대신 국화차를 주문했다. 한국어 발음이 제법 능숙하다.
그의 별명은 '신촌 자취생'.'컴온 스루(C'mon Through)' '더 스터프(The Stuff)' 등 인기곡으로 2006년 첫 내한 공연을 성공리에 치른 그는 한국에 반해 2009년 9월 서울에서 혼자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1년의 자취 생활을 끝내고 지난 5월 에세이집 《할로 서울》과 9월 11곡의 어쿠스틱 음악이 담긴 새 음반 '더 타이거 위드 노 스트라이프스'를 내놨다. 4일 저녁에는 홍대 상상마당에서 단독 공연을 한다.
"모든 음악은 한국에서 영감을 받은 거죠.스웨덴과는 다른 한국의 단면들을 보며,젊은이들을 보며,길을 지나는 사람들을 보며 곡을 썼어요. 매너리즘에 빠졌던 저는 이제 사라졌죠.2006년 첫 공연 때 기억이 생생해요. 유럽,미국 공연을 주로 하던 때였는데 제 음악을 집중해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한국 관객들에게 완전히 매료됐어요. "
열다섯 살 무렵 밴드에서 보컬로 활동하던 그는 기타리스트가 쓴 곡이 성에 차지 않아 직접 작곡을 시작했다. 영화 감독이던 아버지의 영향도 컸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와 기타를 배우겠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창고에서 낡은 기타를 꺼내오셨어요. 그날 10개의 기본 코드를 익히고 한 곡을 만들어 부모님 앞에서 연주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은 멜로디였는데,열심히 들어주셨죠.제가 들고 있는 이 기타도 그때 아버지가 주신 거예요. "
그는 "음악이 인생의 옵션인 적은 없었다"고 말하면서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열다섯 살 때부터 기타 하나 메고 유럽 여행을 몇 주씩 떠나고,학교 숙제를 한 횟수가 열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은 아들 때문에 부모님이 마음 고생 좀 하셨죠.두 살 위 누나는 정반대의 모범생이었는데 말이죠.대신 제 꿈에 반대한 적이 없는 분들이라 감사해요. "
스물한 살에 정규 앨범을 내고 밴드 활동을 할 때 그의 아버지는 밴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쳤다. 함께 첫 앨범 녹음도 했다. "첫 앨범의 기타리스트가 아버지였어요. 제겐 음악을 해온 시간 중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었죠.당시 아버지가 쉰한 살이셨으니까 대단한 거죠.공연 끝나고 뒤풀이 할 때는 친구들하고 편히 즐기라며 먼저 자리를 피해주시곤 했고요. "
1년간의 자취 생활을 끝낸 그에겐 한국 친구들도 많아졌다. 갈비 삼계탕 닭갈비 부대찌개 등 푸짐한 한국 음식도 좋아한다. 그는 "노래방에서 제 대표곡 '컴온 스루'를 불렀는데 75점밖에 안 나와 충격받았다"며 웃었다.
올 연말엔 새로운 도전을 한다. 어쿠스틱 음악 중심에서 벗어나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을 녹음하는 것."스웨덴 외곽의 오두막에서 문 걸어잠그고 녹음할 거예요. 모두 컴퓨터로만 작업하는 첫 앨범입니다. 큰 도전이죠."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