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10만 양병' 당시 인구로는 불가능?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수년 전,율곡 이이는 경연에서 10만 군사를 양성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것을 임금에게 진언했다. 그러나 유성룡 등 일부 신하들의 반대와 임금의 유보적인 태도로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선조 25년(1592)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20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온 것을 본 유성룡이 "이이는 정말 성인이다"라고 한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율곡 10만 양병론의 진실》은 율곡의 10만 양병설을 둘러싼 각종 기록을 살펴보고 그것이 현실성 있는 방책이었는지 분석해본 역사서다. 강병은 우리나라의 현재와 미래에도 으뜸 국가 정책이란 점에서 책의 가치가 가볍지 않다. 관련 사료들을 꼼꼼하게 수집한 덕분에 강병책에 관한 주장들을 한자리에서 비교해 판단할 수 있다는 게 강점이다.

일부 위정자들은 10만 양병책이 당시 인구와 경제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그런 주장은 엉터리였다는 게 기록들을 통해 드러난다고 말한다. 임진왜란 전에도 한때 10만명의 군사가 있었으며 임란 후에는 광해군과 효종 등이 다른 방식으로 10만 양병론을 언급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임진왜란 때 500만 이상 인구 중 3분의 1이 죽었고 남은 백성들도 산목숨이 아니었다"며 "율곡의 10만 양병론의 가르침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