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처럼 수출 비즈니스도 우리 문화 접목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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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과 맛있는 만남 - 홍석우 지경부 장관 내정자
소녀시대 佛 공연 보며 "이거다"…전통 콘텐츠 곁들여 해외 전시회
오페라 마니아서 판소리 전문가로…소주ㆍ홍초ㆍ막걸리 '혼돈주' 즐겨
소녀시대 佛 공연 보며 "이거다"…전통 콘텐츠 곁들여 해외 전시회
오페라 마니아서 판소리 전문가로…소주ㆍ홍초ㆍ막걸리 '혼돈주' 즐겨
"유향도인세 음자수만년(流香到人世 飮者數萬年 · 흐르는 향기가 인간세상에 이르렀으니,그를 마시는 자는 만년을 살리라)." 홍 내정자는 자리에 앉자 주위를 둘러보다 병풍에 쓰인 한시(漢詩)부터 읊었다. 추사 김정희 등과 교유하며 우리나라의 다도를 정립해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조선후기 대선사 초의의 한시 첫 구절이다. 병풍의 글은 민정당 시절 국회 부의장을 지낸 고(故) 윤길중 씨가 쓴 것이다. "초의선사가 말하는 향기는 아마도 차 향기였겠지만 술 향기면 어떻습니까. 유쾌하게 마시고 오래도록 사는 거죠."
'향정'은 전라도에서 직접 공수해온 신선한 재료에 수십년 손맛이 담긴 정갈한 음식,주인이 직접 담근 막걸리,1960년대 한옥의 기본 골격을 그대로 갖춘 집 구조 등이 매력 포인트다. 적당히 삭힌 홍어와 쫄깃한 돼지수육을 묵은 김치에 말아 입에 넣으며 식당 안을 돌아봤다. 그가 왜 이곳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홍 내정자는 2005년부터 이 집의 단골이 됐다고 한다. 음식맛 외에도 빼놓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이곳 사장님이 프로는 아니지만 소리를 좀 하십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판소리를 들려주시는데 그게 참 좋아요. " 방 한쪽에 놓여 있던 북의 용도가 궁금하던 차였다.
그는 관가에서 소문난 '판소리 마니아'다. 젊은 시절부터 오페라,특히 바그너 오페라에 심취해 있던 홍 내정자가 판소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산업자원부(현 지식경제부) 무역정책과장 시절인 2001년이다. "당시 외국인과 만나면 종종 오페라 이야기를 하고는 했는데,한국 오페라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정작 대답할 말이 없다는 게 부끄러웠습니다. "
한국 오페라를 찾던 그는 판소리에서 답을 구하고,당대 최고 소리꾼의 한 사람인 성우향 명창이 국립극장에서 연 칠순 공연 '심청가'를 들으러 갔다.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장충동 족발을 사주겠다고 직원들을 꼬드겨 같이 갔지만,2시간 이상의 전반부 동안 심청은 아직 인당수에도 도착하지 않았다. '족발 먹으러 가자' '그래도 이왕 온 것 다 듣자' 분분한 의견을 딛고 4시간30분 완창을 끝까지 지켜본 것이 판소리와의 첫 만남이었다.
이날 공연으로 판소리에 눈을 떴다면 마니아 수준의 '내공'을 쌓은 계기는 안숙선 명창과의 만남이었다. 판소리를 좋아한다는 소문에 지인의 소개로 안숙선 명창과 저녁 약속을 잡았는데,그날이 공교롭게도 중소기업청장 퇴임날이었다. "안 명창 같은 분은 사석에서 좀체 소리를 하는 일이 없는데 그날 분위기가 너무 좋다며 한 곡조 해주셨는데 강렬했습니다. 당장 내일부터 할 일이 없는데 '판소리 공부 하라는 하늘의 계시구나' 하는 생각이 팍 와 닿았지요. " 다음날 서점에 가서 판소리 책을 모조리 사고,CD도 한 가득 들고와 판소리 공부에 매달렸다. 흡사 고시공부 하듯 두 달 정도 몰입했다. 그 뒤 알고 지내던 기업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판소리 얘기를 했더니,입소문이 나 최고경영자(CEO) 조찬 포럼이나 대학생 멘토 강연 등에 불려가 10차례 가까이 판소리 강연도 했다.
형식주의 문화에도 손을 댔다. 보고서에 음영을 넣거나 강조 문체를 사용하는 식의 불필요한 장식을 없애고 내부 행사에서 명패,공항 의전 등을 생략했다. 중기청장 출신답게 중소기업 지원도 역점 사업으로 추진했다. 직원 1명이 중소기업 5개를 전담하는 '초보기업 멘토제' 등이 대표적이다. 해외 비즈니스와 우리 고유 문화의 접목도 주요 사업 중 하나였다. 그는 내년부터 해외 전시회에 앞서 판소리 공연을 하는 등 문화를 통한 사업 시너지 확대 방안을 구상 중이었다.
"취임 직전 프랑스에서 소녀시대가 K팝으로 인기몰이를 하는 것을 보면서 KOTRA의 수출지원 업무에도 한국 고유의 색깔을 입혀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문화콘텐츠뿐 아니라 바이오,신재생에너지,제조업 등 다양한 분야의 해외 시장 진출에도 우리 고유의 색깔을 입히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판소리와 오페라 등 예술을 사랑하는 그가 KOTRA의 알파벳을 뒤집어 부른 표현이 있다. 'ARTOK(아트 오케이).'
파릇한 돌나물 무침과 쌉싸름한 메밀묵,향긋한 홍어전 접시까지 바닥이 날 즈음 토란탕이 나왔다. 고소한 들깨가루가 기분좋게 입 안에 퍼지는 찰나 그가 소주와 홍초를 주문한다. 판소리 이야기에 빠져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는 2006년부터 막걸리 예찬론을 펼친 선구적인 '막걸리 전도사' 중 한 사람이다.
그가 요즘 술자리에서 즐겨 만드는 막걸리 폭탄주의 레시피.맥주잔에 맥주는 절반 미만으로 따르고,소주는 3분의 2 정도 위스키 스트레이트잔에 채워 맥주잔에 빠뜨린다. 떠 있는 양주잔에 넘치지 않을 만큼 홍초를 따른다. 소주,막걸리,홍초 순으로 입 안에 들어와 달콤하게 술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천천히 마시는 게 포인트다. 홍 내정자는 이 술의 이름을 '혼돈주'라고 부른다. 자신이 고문서까지 뒤져 찾아낸 우리 선조가 지은 막걸리 폭탄주의 이름이다. 정조시대에 연암 박지원 등 북학파와 가깝게 지내던 학자 중 석치(石痴) 정철조가 있다. 그는 호처럼 '돌에 미쳐',좋은 돌만 보면 벼루를 만드는 취미가 있었다. 당시 장안에 석치의 벼루 하나 없으면 권세가가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 석치가 소주(증류식) 한 병 생기면 막걸리를 받아와 섞은 뒤 혼돈주라 부르며 즐겨 마셨다는 기록이 야사에 나온다고 한다. 그와 진한 우정을 나눴던 연암이 석치가 세상을 뜨자 직접 쓴 제문의 한 구절.'몇 섬의 술을 마시고 서로를 벌거숭이가 되어 치고 받으면서 고주망태가 되도록 취해 함부로 이놈 저놈 부르다 먹은 것을 게워내고,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속이 뒤집히고,눈이 어질어질 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그만두건만,이제 석치는 진정 죽었구나!"
◆"지경부 가서 KOTRA 지원군 될 것"
어머니 손에 붙들려 남산의 용하다는 점집에 갔다. 숨이 턱 막히는 말이 돌아왔다. "학생은 대학갈 운명이 아니야." 얼굴이 시뻘게져 있는 그에게 한마디 더해졌다. "대학 들어갈 팔자는 못 되지만,수석할 실력을 쌓으면 붙기는 해." 그리고 이 말은 지금까지 홍 내정자의 인생을 관철하는 좌우명이 됐다. '팔자를 바꿀 정도의 노력.' 홍 내정자는 그해 서울대 수석은 못했지만,문과 전체 14등으로 무역학과에 들어갔다. 물론 다른 곳에서 수석을 하긴 했다. 대성학원 수석 졸업.
대학에 입학했을 때 고교 절친 중 한 명인 권오규 전 부총리는 이미 행정고시에 합격한 상태였다. 그래도 어떻게 들어온 대학인데….입대를 미루고 1년반가량 신나게 미팅하며 다녔는데,그 사이 징집 규정이 바뀌었다. 방위 복무인 '2을' 판정이 대학생의 경우 현역 입영 대상으로 변했다. 군생활은 사역 많기로 유명한 철원 6사단 철책부대에서 했다. 막내동생보다도 어린 고참들을 모시면서 겸손을 배웠다.
홍 내정자는 인생의 불운은 여기까지였다고 한다. 군에 다녀온 사이 행정고시에 붙은 정 전 지사에게 자극받아 행정고시에 도전,7개월 준비 만에 첫해에 1ㆍ2차 시험 모두 합격했다. 여기서도 몇 가지 해프닝이 있었다. 2차 시험은 맛보기로 볼 요량으로 통독하지 못하고,나올 법한 부분을 찍어가며 공부했다. 헌법은 손도 대지 않고 있다가 시험 1주일 전 10ㆍ26 사태가 나자 '헌법 개정'에 대해서만 집중 공부했다. 국제법 시험 전까지 찍은 곳에서 상당 부분 나오자 '이제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지막 국제법 과목에서 '외국에서 전쟁이 났을 때 우리나라의 의무를 논하라'는 문제에서 완전히 막히고 말았다. 그래도 칸은 채워야겠다는 생각에 상상력을 총 동원해 '소설'을 빼곡하게 채워 냈다. 후에 성적을 보니 나머지 과목은 간신히 과락을 면했고,정작 국제법은 90점을 넘었다.
따끈한 누릉지로 마무리를 하고 있는데 향정 사장님이 북을 들고 앉는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판소리 단가 '사철가'의 한 대목을 나름 구성지게 뽑는다. 혼돈주에 더해 이를 듣고 있으니 "우리 소리 참 좋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다.
자리를 파하고 인사동길로 나오니 외국인들로 이뤄진 거리 악사 트리오가 '대니 보이'를 연주하고 있었다. 참 기분 좋은 밤이었다. 장관 내정 이후 그와 통화했다. "지경부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해 고민하면서 KOTRA 업무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막중한 책무를 맡게 돼 어깨는 무겁지만 그간의 공직 경험을 살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KOTRA 역시 지경부 산하 식구인 만큼 추진했던 사업이 제대로 실행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입니다. "
이유정 기자 yjlee@hankyung.com
◆홍석우 내정자의 단골집 향정
홍어ㆍ보리굴비 유명…직접 담은 막걸리도 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