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을 따끈하게 덥혀 먹으려고 원예반에 들어갔어요. 원예반에는 꽃을 키우느라 난로가 있잖아요. 그렇게 우리의 인연이 시작된 거죠."

지난 2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막걸리집에 중년 남성 7명이 모였다. 걸쭉한 탁주가 두세 잔 돌아가자 다들 얼굴이 불콰해졌다. 이들은 경기상고 원예반에서 만난 동기동창이다. 1971년 입학해 1974년에 졸업했다. 1955년 양띠,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 맏형이다. 올해로 만난 지 꼭 40년이 된다. 이들은 그동안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 인생 마디마다 시대상이 깊숙이 박힌 베이비부머 7인의 직업 이야기를 들어보자.

까까머리 남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이탁수 · 김연성 씨는 금융권에 입사했고,이태기 · 권순관 씨는 굴지의 건설사에 들어갔다. 정성균 씨는 보험회사에 취직했고,심상태 씨는 공업용벨트를 파는 가게를 꾸렸다. 김유영 씨는 대학에 진학한 후 주류업체에 취직했다. 정성균 씨는 "1970년대는 경기상승 초기여서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취업을 할 수 있었다"며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정신없이 일했다. 증권회사에 입사한 김연성 씨는 "당시 정부의 자본시장 육성 정책에 따라 기업공개가 줄을 이었어요. 1주일에 두 번 집에 가면 잘 갔을 정도로 일했죠." 하루에도 몇 개씩 상장회사가 늘면서 업무량은 폭주했다.

이태기 · 권순관 씨는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으로 파견됐다. 3년을 중동 태양볕에 그을렸다. 이씨는 "고생은 했지만 그때 달러를 벌어들여 우리가 잘살게 되지 않았느냐"며 자부심을 표했다. 권씨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이때의 경험을 통해 시야가 넓어졌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시대의 복병,외환위기

김유영 씨가 막걸리를 입에 털어 넣고 얘기를 꺼냈다. "아침에 딱 출근을 했는데 당장 서울 논현동 본사로 출근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어요. 그 사이 상사는 면담을 해서 동료과장 6명 중 3명에게 보따리를 싸라고 했죠." 회사인력 중 절반이 명예퇴직을 당했을 때 김씨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회사 3개가 하나로 합쳐졌어요. 그런데 일할 사람은 모자랐죠.잘 모르는 분야까지 소화해야 했어요. 새벽 1시 전에는 집에 들어가지 못했죠."

김연성 씨는 외환위기로 옷을 벗었다. 증권사 지점장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했지만 시대의 거대한 파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인생 2모작,그 어려운 첫걸음

사무직이던 4명 중 3명이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땄다. 김연성 · 김유영 · 이탁수 씨가 주인공이다. 김연성 씨는 6년 전 부동산 사무실을 차렸고,김유영 씨는 지난 9월 사무실을 냈다. 은행 지점장을 지내고 작년에 정년퇴직한 이탁수 씨는 부동산 사무실을 내기 위해 분위기를 살피는 중이다.

왜 사무직 출신 동창들은 유독 공인중개사를 많이 땄을까. 김유영 씨는 "펜대쟁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며 "퇴직금 받은 걸로 대출금 갚고 나니 남는 게 별로 없고,그렇다고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경비나 창고지기를 하기에 우린 아직 젊다"고 했다. 김연성 씨는 "사무실 유지비용이 최하 200만원인데 한 달에 거래를 10건은 해야 그나마 현상유지가 된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우리는 아직 일하고 싶다

베이비붐 세대의 삶은 대한민국의 수레바퀴와 함께 굴러왔다. 열심히 일해 부모님을 모셨고,아내와 자식에게 헌신했다. 국가는 이들을 '산업역군'이라 불렀다. 앞만 보고 계속 달려왔다. 그 사이 머리에는 듬성듬성 서리가 내리고 이제 사회는 그들에게 쉴 것을 얘기한다. 김유영 씨는 "국가의 무상복지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젊었을 때의 반만큼이라도 일하고 싶다"고 했다. 50대가 일을 하지 않아 세수가 줄면 결국은 자식들이 그 몫을 감당해야 할 것이란 말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