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그리스와 박원순 시장
박원순 서울시장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지난달 27일 취임하자마자 표류하던 무상급식 사업안에 서명했다. 서울의 초등학교에선 그래서 이달부터 전면 무상급식이 시작됐다. 서울시립대 학생들의 등록금도 내년부터 절반으로 줄이기로 했다. 서울시 직원과 투자 · 출연기관의 비정규직 근로자 2800명도 정규직으로 전환키로 했다.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하던 문제들을 속전속결로 처리하는 박 시장의 결단력이 돋보인다. 서민 중심의 정책을 펴겠다는 선의(善意)가 정책에 일관되게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솔직히 불안한 마음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박 시장이 보여준 취임 후 10일간의 행보는 30년 전의 그리스 정부를 연상시킨다. 당시 집권한 사회당 정부의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전 총리(현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의 아버지)는 "국민이 원하는 것은 다 해줘라"란 말을 국정의 기본 방침으로 삼았다. 당시 유럽 경제의 우등생이었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떨어졌던 복지 수준을 끌어올리려는 욕심이었다. 대학원까지 정부가 등록금을 대주고,실업률이 높아지면 공무원을 더 뽑는 '그리스식 복지'는 이렇게 시작됐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집권 8년(1981~1989) 사이 국가 부채 비율은 국내총생산(GDP)의 28%에서 80%로 부풀었다. 무한 확장본능을 가진 복지에 포퓰리즘으로 무장한 정부는 더 없이 좋은 성장환경이었다. 올해 그리스의 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은 143%에 달한다. 재정위기라는 청구서가 날아드는 것은 시기의 문제였을 뿐이다.

한국에서도 '무상과 반값 시리즈'로 복지의 확대 본능이 나타날 조짐이다. 당장 내년부터는 서울지역 중학생들에게도 무상급식이 시행된다. 여기에 들어갈 돈은 2000억원이 넘는다. 서울 이외의 지방자치단체에서 돈을 지원받는 4년제 대학과 전문대학이 반값 등록금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처리할지 우려된다.

복지 확대를 폄하할 이유는 없다. 경제규모의 확대에 맞게 삶의 질이 개선되고 있냐는 질문의 정답은 '아니오'이다. 직장에서 언제 잘릴지 불안해 하고,아이들 교육비에 숨을 헐떡거리며,월급을 모아 집을 사는 게 불가능해진 2040세대가 이번 선거에서 표출한 불만도 이런 것들이다.

그러나 그리스식 처방전을 남발한다면 그건 정말 돌팔이의 진단법이다. 기획재정부는 이달 초 발표한 '2011년 거시경제안정보고서'에서 현재의 복지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선 미래 세대가 현 세대의 2.4배에 달하는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반도체나 자동차 이후의 미래 성장동력도 불투명하고,중국처럼 인구가 많아서 내수만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처지도 아닌 한국이 고민해야 할 일은 성장의 바퀴를 어떻게 더 힘차게 돌릴 것인가 하는 것이어야 한다.

박 시장은 7일 한 · 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사실상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게 서울시장이 나서서 할 얘기인지 어리둥절해진다. 어떻게 일자리를 더 만들 것인가를 발표했더라면 박 시장에 대한 믿음이 훨씬 강해졌을 것 같다. 그리스는 반면교사(反面敎師)이지 우리의 모델이 될 수 없다. 하기 편한 말만 하고,인기를 좇는 길을 따라해서는 곤란하다.

조주현 국제부장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