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로빈후드 놀이하나
내년 정부 예산안에 대한 국회 심의가 시작됐다. 우려했던 대로 여야 의원들은 첫날부터 복지지출을 원안보다 최대 10조원이나 늘리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재정 건전성은 금방 무너지고 만다.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경제가 문제라고 말하지만 그 논리는 경제원칙을 비틀고 꺾는 것들뿐이다. 특히 성장은 희생양이 돼 버렸다. 성장이 복지와 고용의 원천이건만 실업과 분배악화의 주범처럼 간주되는 정도다. 현재의 문명과 지식의 발전이 성장의 결과라는 역사적 진실은 은폐돼 잊혀져간다.

고용없는 성장이 문제라며 이젠 고용을 통해 성장해야 한다는 앞뒤가 바뀐 기괴한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이는 결국 반시장,반기업 정서와 닿는다. 정부도 이런 장단에 맞추는 데 점점 능숙해져 간다. 임시투자 세액공제 폐지도 대기업 우대제도를 없애라는 정치권의 주문을 수용한 결과에 다름아니다. 그렇지만 대안으로 신설되는 고용창출 세액공제에 대해 중소기업들조차 별로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한다. 고용을 늘리면 투자도,성장도 따라올 것이란 정치논리와 이를 추종하는 정부가 얼마나 허구적인지 그대로 드러난다. 하기야 새삼 놀라울 것은 없다. 정부가 공정이니 동반이니 하며 판을 벌이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다. 실용주의의 허무한 종말일 뿐이다.

다음 정부로 넘어가도 사정은 별로 나아질 게 없을 것이다. 여야 대선주자들의 경제해법이란 게 성장을 버리고 복지와 고용으로 가자는 내용 일색인 까닭이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비전조차 다르다고 보기 어렵고 2040세대가 열광하는 안철수 교수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그렇더라도 어떻게 성장의 뒷받침없는 고용과 복지가 가능하고 지속될 수 있는지 답해야 한다. 무엇보다 일감 확대가 전제돼야 가능한 일인데도 우리의 지도자들은 일감을 어떻게 늘릴지에 대해선 아무 말도 없다. 그런 일은 기업들이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니 자신들은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으면 된다는 생각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정치가 제시하는 개별 가치들이 상충되면 부분의 합이 모순을 드러내는 '구성의 오류'가 필연적으로 초래되는 법이다.

어떤 대통령도 모든 세대와 계층을 만족시키기란 불가능하다. 지지율만 봐도 30%대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한 표라도 더 받으려고 예외없이 지키기 힘든 공약들을 내놓았지만 임기 후반엔 족쇄가 돼 지지도가 여지없이 추락했다. 역대 대통령들이 한결같이 대통령은 너무 힘든 자리라고 고백했던 이유다.

지금 대권후보들도 똑같이 자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든다. 대중의 기대가 한껏 커지는 이유다. 20대의 취업난, 30대의 상대적 박탈감, 40대의 노후 불안, 50대의 이념과 정체성 걱정을 모두 해결해줄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리더십은 존재할 수 없다. 로빈후드가 와도 실망만 시키고 돌아갈 것이다. 대세론이나 신드롬 다 마찬가지다.

대통령을 뽑은 다음에 매번 실망하지만 이제는 찍은 게 후회되더라도 더 감출 손가락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정치가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말하는 리더가 필요하다. 땀과 노력없이는 잘살 수 없다고 진실을 말하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정치에 슈퍼맨은 없다고 고백할 때 비로소 희망이 생긴다.

문희수 논설위원 m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