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수능 보는 날
율곡 이이는 과거시험의 스타였다. 문과에 급제하기 위해 거쳐야 했던 9단계 시험에서 시종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명종 19년(1564년) 치러진 생원시의 초시와 복시에서 장원을 차지한 건 시작에 불과했다. 같은 해 식년시에서도 초시와 복시의 초 · 중 · 종장을 모두 수석으로 통과했다. 마지막으로 임금 앞에서 치르는 전시에서도 장원에 올라 '9도장원(九度壯元)'이라 불렸다. 조선 500년을 통틀어 9관왕의 기록을 세운 이는 율곡 한 명뿐이다.

시험을 통해 입신양명하려는 건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송나라 황제 진종은 '권학가(勸學歌)'에서 학문의 목적을 직설적으로 제시한다. '부자가 되기 위해 좋은 밭을 살 필요가 없다/책에서 천 가지 곡식이 자연히 쏟아져 나온다…/예쁜 아내를 얻기 위해 좋은 중매쟁이가 없음을 탓할 것도 없다/책 속에 옥 같은 얼굴의 미녀가 있다. ' 열심히 공부하면 남편의 직업,또는 아내의 얼굴이 바뀐다는 요즘의 수험생 유머와 놀랍도록 닮았다.

대입 준비도 과거시험 못지 않게 진을 빼는 고행이다. 3시간을 자면 원하는 대학에 붙고 4시간을 자면 떨어진다는 '3당4락'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다. 세상엔 수험생과 일반인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유머가 나온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한눈팔 겨를도 없이 학교와 학원과 독서실만을 기계처럼 오가는 시간들이다. 그렇다고 감정까지 메마르는 것은 아니다. '고3이라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공부가 끝나 돌아오는/가로등 밝힌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오늘 수학능력 시험일이다. 69만 수험생이나 부모들에겐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애가 타는 날이다. 딱 하루에 너무 많은 것들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결과에 흡족해하는 측은 적은 반면 대다수가 실망할 수밖에 없는 게 수능이다. 마지막 답안지를 내고 나면 허탈해하는 수험생이 숱할 것이다. 그러나 시험이 끝났다고 생이 끝난 게 아닌 것처럼 시험의 실패가 인생의 실패는 아니다.

성적의 앞순위에서 밀려났다 해도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은 열려 있다. 연암 박지원은 1765년 과거에 응시했다 낙방했지만 새로운 문물 연구로 일가를 이뤘다. 윈스턴 처칠도 육사 시험에 두 번이나 떨어졌다. 중요한 건 당장의 결과보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다. 그동안 숨가쁘게 달려온 수험생들에게 격려를 보낸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