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종이 1만번 두드리고 오방색 입히고…'한지 퍼포먼스'
한국화가 함섭 씨(70 · 사진)의 작업 과정은 하나의 '한지 퍼포먼스' 같다. 닥나무 껍질을 날 · 씨줄로 엮은 다음 장지 7장을 겹겹이 쌓아 솔 방망이로 1만번 이상 두드려 울퉁불퉁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그 위에 오방색 한지와 고서를 찢거나 꼬아 붙이고 짓이겨 형상을 앉힌다. 화폭은 속살이 은근히 비치는 여인의 삼베 저고리 같기도 하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인전(20일까지)을 갖고 있는 함씨는 "전통 지승공예를 현대미술과 접목함으로써 한국화의 새 활로를 개척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그는 화업 40년 내내 전통 한지의 푸근한 질감을 독특한 조형언어로 풀어왔다. 1990년대 말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트페어와 시카고 아트페어에서 출품작이 매진되는 등 해외에서 먼저 주목받았다. "지금까지 국제 아트페어에만 70여회 참여했어요. 미국 유럽 아시아 지역에서 500~600여점 팔린 것 같습니다. "

그는 무엇보다 화면의 바탕에 의미를 둔다. 박수근 그림의 질감처럼 자신의 작품을 대표할 수 있는 게 바로 바탕이라는 것이다. 전통 한지를 이어 붙인 화면은 붓으로 그리는 것 이상의 조형미를 발산한다.

그는 "닥종이 본래의 황토빛과 오방색 한지가 어우러지면서 서양화의 액션 페인팅 같은 역동성과 우리 고유의 구수한 된장 맛이 함께 우러난다"고 설명했다. 손의 율동은 춤처럼 화면에 그대로 전달되며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한지판 위에 물에서 건져낸 색종이 조각들을 붙이는 일은 재미나는 놀이입니다. 회화적 공간을 건축가처럼 구축해 나가는 것이지요. "

최근에는 화면이 한층 밝아지고 여백의 미도 더 커졌다. 황소와 한옥,새,달 등의 형상도 보인다. '추상성과 구상성이 함께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젖은 한지를 그림판에 붙여나가는 그의 작품에서는 한약방 냄새가 난다. 향기의 근원은 접착제에 섞어 쓰는 한약재 천궁이다. 머리를 맑게 하고 부인병에 좋다는 약재다. 좀을 방지하는 데도 좋지만 집안에 그림을 걸어 두면 은은한 향이 정겹다. 이번 전시에서는 '백일몽' 시리즈와 함께 100호 이상 신작 50여점을 만날 수 있다. (02)580-13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