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규 전 경제부총리는 13일 "요즘 제가 후배들 '착취'하면서 살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처리해야 할 것은 많은데 돈은 빠듯하니 인맥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권 전 부총리는 정부가 개발도상국과 진행하는 경제발전경험공유사업(KSP) 중 인도네시아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매니저다. KSP는 한마디로 국가개발 컨설팅이다. 인도네시아와는 수자원개발과 공공재정 확충,신용인프라 구축을 과제로 선정해 진행 중이다. '부총리까지 지냈으니 얼굴마담이나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권도엽 국토해양부 장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수자원 개발 전문가를 구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고,증권거래소에 연락해 인도네시아 금융감독청 직원 연수를 부탁하는 일도 그의 몫이다.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전문가를 현지에 보낼 출장비가 부족해 지식경제부 수출진흥자금을 끌어서 대기도 한다.

KSP는 고위 정책대화로 시작된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재무부 경제개발부 에너지부 무역부 현직 장관과 금융감독청장이 직접 나와 권 전 부총리와 협의를 시작한다. 요청은 많은데 예산과 인원이 턱없이 부족해 우선 순위를 정하는 게 가장 힘들다. 1개 프로젝트당 예산은 4억원 안팎.돈을 아끼기 위해 과제별로 최정예 인력 1~2명만 선발할 수밖에 없다. 권 전 부총리는 "한국은 한 세대에서 경제개발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성취한,전 세계에서 유일한 국가"라며 "다른 나라가 갖지 못한 성공 스토리가 최대 자산"이라고 말했다. 현직을 떠났지만 33년간 공직에 몸담으면서 쌓은 경제개발 노하우를 활용하는 보람도 크다고 그는 말했다.

윤대희 전 국무총리실장(장관급)은 아프리카와 동남아 국가를 주로 담당하고 있다. 가나 에티오피아 베트남 라오스를 맡아 경제개발계획 수립에서부터 민자인프라 구축,수출신용기구 설립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처리한다. 내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맡게 됐다. 윤 전 장관은 "아프리카에서 한국은 선망의 대상"이라며 "그 어떤 무상지원보다 개발 경험의 전수가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병원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우즈베키스탄의 국가혁신 시스템을,김영주 전 산업자원부(현 지식경제부) 장관은 카자흐스탄을 맡아 중소기업 발전을 위한 신용보증기금 제도 도입을 컨설팅하고 있다. 내년에는 볼리비아가 추가된다. 김 전 장관은 "현직에서 쌓은 노하우를 국가를 위해 재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장태평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도 미얀마와 파나마를 맡아 경제개발을 위한 농업개발과 농산품 수출활성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KSP사업을 통해 추진한 과제는 22개국에 걸쳐 200개에 이른다. 올해 KSP사업에 배정된 예산은 140억원이지만 수십배의 효과를 얻고 있다는 게 기획재정부 설명이다. 세계은행(WB)도 우리나라의 KSP사업을 인정,개도국의 경제사회 발전을 위한 공동 컨설팅을 벌이기로 하고 지난 8월 우리 정부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허장 재정부 개발협력과장은 "예산이 부족해 처우가 형편없고 대상국가도 대부분 후진국이라 환경도 열악하다"며 "장관을 지낸 분들이지만 조건을 따지지 않고 열과 성을 다해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장보영 재정부 국제개발정책팀장은 "현지 고위직과의 네트워크를 쌓으면서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 것은 물론 국내기업의 현지 진출과 수출시장 개척 등 KSP사업 효과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라며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이심기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