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일본에선 배우겠다는데
일본 백화점들의 매출은 1998년 이후 14년째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백화점업계는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는 동안 큰 타격을 받은 곳 중의 하나다.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은 탓이다.

국내 백화점들의 사정은 다르다. 2004년 신용카드 사태로 인해 마이너스 성장을 했지만,이후 2005년부터 7년 연속 성장세다. 시장의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해 혁신에 성공한 결과다. 자신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는 '가치소비족(族)'은 물론 '명품소비족'까지 모두 끌어들였다. 단순히 소비자들이 원하는 상품을 들여놓는 데 그치지 않았다. 다양한 소비자들이 와서 실컷 먹고 즐기고 쉴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대표적인 형태가 복합쇼핑몰이다. 쇼핑은 물론 외식과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고루 갖춰놓았다. 부산의 신세계 센텀시티점과 롯데 광복점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지역 명소가 됐다. 롯데백화점은 다음달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 인근에 '롯데몰 김포공항'을 연다. 신세계는 경기 하남과 인천 청라,현대백화점은 경기 판교와 충북 청주 등지에 초대형 복합몰을 건설할 예정이다. 일본에서 복합쇼핑몰의 주도권을 미쓰이 등 부동산개발회사에 빼앗긴 일본 백화점들의 상황과는 사뭇 다르다.

이런 쇼핑몰에서 물건을 사고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을 '몰링(malling)족'이라고 한다. 몰링족과 명품족을 한데 아우르면서 유통가의 명소를 만들어낸 '융합DNA'가 국내 백화점들의 핵심 경쟁력이다. 오죽했으면 '한국 백화점의 스승'이라고 불렸던 일본 백화점들이 한국을 배우겠다고 나섰을까. 작년 여름엔 일본의 대표적 백화점인 이세탄백화점 사장을 단장으로 한 조사단이 한국 백화점을 찾기도 했다. 일본백화점협회 차원의 공식 행사였다. 경쟁력의 원천이 뭔지를 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올초에도 일본 철도회사 · 백화점 합작사인 'JR도카이 다카시마야'의 종합기획실장 등이 신세계 본점을 찾았다. 나고야점을 전면 리뉴얼하기에 앞서 한국 백화점의 매장 운영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고객관리와 개인휴대단말기(PDA)를 활용한 효율적인 서비스를 벤치마킹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국내 백화점들이 '유통 대기업'이란 이유로 '공생'의 도마 위에 올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입점업체에 대한 판매수수료를 강압적으로 깎아주도록 했다. 국회는 입점업체에 판촉비를 넘기거나 반품행위를 법으로 금지시키기도 했다. 거래상의 '잘못'에 대해 정부가 가려내는 게 아니라 백화점이 해명하지 못하면 처벌할 수 있도록 해 백화점을 '잠재적 범법자'로 내몰았다.

유통업계의 우려는 이런 규제를 통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한 백화점 고위 관계자는 "내수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면 국내 백화점 '빅3' 중에서도 도태되는 곳이 나올지 모른다"고 털어놨다. 유통회사와 입점업체가 모두 어려워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백화점협회 회원사는 외환위기 전엔 43곳에 달했던 것이 지금은 8개사로 줄어들었다.

정부와 정치권은 유통업계를 옥죄기에 앞서 이들의 융합 노하우를 익혀야 할 것이다. 편가르기로 갈등을 부추길 것이 아니라 포용하고 끌어안는 자세로 진정한 '공생'을 일궈나가야 한다.

손희식 생활경제부장 hssoh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