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방지일 목사 "목사 공고내면 이력서 300장 몰려…그렇게 뽑으면 '삯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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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현역 방지일 영등포교회 원로목사
"주님이 귀 잡수셨나요"
'오,주여' 큰 소리 남에게 방해만…기도는 내 귀에 들릴락말락해야
중국 선교 사진집 출간
20세기 전반 고단한 여정 고스란히…탄압 이겨낸 힘은 '사람'이었지
"주님이 귀 잡수셨나요"
'오,주여' 큰 소리 남에게 방해만…기도는 내 귀에 들릴락말락해야
중국 선교 사진집 출간
20세기 전반 고단한 여정 고스란히…탄압 이겨낸 힘은 '사람'이었지
1911년생이니 올해로 만 100세.그래도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주일이면 강단에서 설교하고 평일에는 각종 행사와 성경공부 모임,강연,결혼식 등에 단골로 초빙된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오라는 데는 다 간다. 미국처럼 먼 곳도 주저없이 다녀온다. 지난달에는 90분간 서서 강연한 적도 있다. 사람들과 이메일로 소식을 주고받을 만큼 시대 흐름에도 뒤지지 않는다. 한국 개신교계의 최고령 목회자인 방지일(方之日) 서울 영등포교회 원로목사 이야기다.
방 목사가 최근 중국선교 사진집 《중국선교를 회고하며》(홍성사)를 출간했다. 평양 숭실대 영문학과와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방 목사는 1937년부터 21년 동안 중국 산둥성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사진집에는 자신은 물론 1913년 중국으로 파송된 박태로 · 김영훈 · 사병순 목사 등 최초의 선교사 3인과 선친인 방효원 목사 등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사진집 출간을 구실 삼아 방 목사의 거처인 서울 등촌동 실버타운으로 찾아갔다. 꼬박 한 세기를 산 원로 종교인으로부터 어지러운 세상을 밝혀줄 지혜의 말씀을 구하기 위해서다. 방 목사는 다리가 조금 불편하고 귀가 어두워 큰 소리로 말해야 알아듣는 정도 외에는 건강해 보였다. 나지막이 이야기하다가도 강조하거나 농담을 던지고 웃을 땐 목소리가 우렁우렁했다.
▼선교 사진집을 보니 20세기 전반의 고단했던 삶이 담겨 있군요. 당시 중국에서의 생활은 어땠습니까.
"그 어려움이란 일일이 다 말하기 어려워요. 제가 국민당 집권기,일본 점령기,미국 치하,다시 국민당 정권,공산 정권 등 다섯 정권 하에서 선교를 했어요. 일본 점령기에는 같이 선교하자는 일본 사람들의 요구를 거부했다가 반일 · 항일로 몰려 가택수색에다 헌병대로 끌려다니는 등 많은 고초를 겪었죠.그래도 같은 목회자인데 일본 목사들이 저를 고발했을 땐 너무 원망스러워 많이 울었습니다. 공산 치하에서는 종교를 탄압하니 더 말할 것도 없었고요. 사진을 정리하다보니 그때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더군요. "
▼공산당의 탄압을 받을 때에도 중국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던데.
"중국 공산당 정권이 종교를 탄압해 많은 교인이 떠나고 본국과는 연락이 두절돼 아무런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때 중국인들이 배급받은 천으로 옷과 신발을 만들어 밤에 몰래 던져놓고 갔어요. 홍콩으로 추방됐다가 1957년 귀국했을 때 부산 경찰이 제 짐을 조사하더니 성경책 사이에 인민폐 20원을 왜 끼워 갖고 왔느냐고 물었어요. 그만한 돈이면 당시 한 가족 생활비였는데,어떤 분이 내 전송예배 때 몰래 성경에 끼워넣었을 것을 생각하니 정말 눈물이 나더군요. 그땐 정말 우리 모두가 한몸이었습니다. "
▼내년이면 목사 안수 75주년인데 여전히 활동이 많으십니다.
"이젠 많이 걷지를 못해요. 한국 목사 가운데 100살 넘은 사람이 몇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나처럼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사람은 없는 모양입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오라가라 해서 끌려다니는데 구경거리죠,뭐."
▼얼마 전에는 90분 동안 서서 강의하셨더군요. 다리도 불편한데 왜 그러셨나요.
"신학교에서 '원로목사와 만남'이라고 90분씩 강연을 두 차례 했어요. 전부 네 차례 하기로 했지요. 저는 강단에서 탁자에 손을 짚고 강연하는 건 되는데,앉아서 하는 건 아직도 용납이 안 돼요. 대중은 저보다 크잖아요. 제가 100살이지만 50살,40살 되는 사람들이 몇만 있으면 저보다 청중의 나이가 훨씬 많거든요. 그래서 유치원 아이들 앞에서도 앉아서 강의하진 않아요. 무례하잖아요?"
▼1957년 목사님이 귀국한 뒤 한국 교회가 많이 성장했습니다. 그에 따른 부작용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은데.
"사람이 많다고 교회가 커지는 게 아닙니다. 신앙이 커져야죠.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돼야 해요. 수만 명이 모이는 것보다 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이 계셔야 해요. 그런 사람이 필요하지 단지 많은 수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
▼하지만 그게 현실에선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여러 유혹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겐 물욕,명예욕,성욕이 있단 말이죠.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내가 주님 앞에 갈 때에는 그런 게 없어지겠지만,육신이 살아있을 땐 욕심이 살아 있으니 별 수가 없어요. 요새 목사들이 좋지 못한 행동을 한다고들 비판하는데 예수의 제자 가운데에도 예수님을 팔았던 유다가 있었어요. 우리 몸에도 오줌통,똥통이 함께 있잖아요.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속사람과 겉사람이 싸우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날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버리라'고 하신 게 그 뜻입니다. 자기를 이기라는 말씀이죠.신앙의 힘은 거기에 있는 겁니다. "
방 목사는 "신앙적으로 우리는 미완성품"이라고 했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예수님처럼 완성품이 되지는 않으며,단지 완성품이 되려고 애쓸 뿐이라는 얘기다. 그 과정에서 욕망의 유혹에 빠지면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교회가 타락했다고 흔히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의 일이며,교회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방 목사는 지적한다.
▼전에 뵈었을 때 기도에 대해 들려주신 말씀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기도란 내 말이 내 귀에 들릴락 말락해야지,그 이상이면 남에게 방해가 돼요. 요즘 사람들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 소리 높여 '오,주여' 하고 외치는데 이건 남에게 방해만 됩니다. 주님이 귀 잡수셨나요,그렇게 소리치게.내외간에 사랑하는데 남들한테 '나,이 사람 사랑해요. 우리 보세요,입 맞춰요'하고 소문 냅니까. 그냥 남몰래 가서 입맞춰야죠,하하하.하나님도 그렇게 만나는 거예요. "
▼그런데 기도를 왜 하는 겁니까. 뭘 바라면서 기도를 하나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죄입니다. 음란한 짓,도적질,사기 등의 죄를 찾아내는 건 쌀바구니에서 사과 알 고르듯 쉬운 일입니다. 말로 할 수 없는 죄가 있는데,기도는 그런 죄를 찾는 현미경입니다. 가령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고 남을 시기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는 건 사실이거든요. 겉으로는 좋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시기하는 그런 죄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 밉죠."
▼그러면 복을 비는 기도는 어떻습니까.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죄를 자복해야 하나님이 사랑하시게 돼요. 그런데 보통은 예수 믿으면서 아이들 학교 잘 들어가고,장사도 잘되고,내가 편안하고,운전해도 사고 안 나기를 바라죠.그런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긴 하지만 내 마음에서 양심의 자유를 얻는 게 진짜 복입니다. "
▼교회가 배금주의에 물들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를 모시는 걸 과거에는 청빙이라고 했어요. 요새는 목사 자리가 비면 신문에 공고를 내는데 그러면 이력서가 100장,200장,300장씩 들어와요. 장로들이 이력서를 훑어보고 설교 테이프를 들어본 다음 괜찮다 싶으면 지원한 목사더러 교회로 와서 설교를 직접 해보라고 합니다. 그건 청빙이 아니라 고빙(考聘)이죠.하루에 얼마씩 준다,일하러 오라,그렇게 뽑으면 목사가 아니라 삯꾼들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지금도 한 · 미 자유무역협정(FTA) 때문에 국회가 시끄럽습니다.
"민주주의의 원칙은 다수결인데 국회에서 의장석을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앉아서 싸워서야 되겠습니까. 한국 국회는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본이 하나도 못 됩니다. 아이들이 싸우다 '야,여기 국회냐?' 하면 어떻겠습니까. 다들 국익을 우선하지 않고 자기 정당,자기 정권만 생각합니다. 복지정책도 그래요. 무료급식 다 해서 잘된 나라가 있어요? 스웨덴이 그러다가 망할 뻔한 위기를 겪지 않았습니까. "
방 목사는 기자에게 "아이가 몇이냐"고 묻더니 둘이라고 하자 "하나 더 낳으라"고 강권했다. 또 "어머니가 나를 낳기 위해 뱃속에서 붉은 피를 한 드럼통은 흘렸고,낳고 나서는 흰 피(젖)를 그만큼 먹였다"며 "그런 사람들이 아이를 안 낳거나 적게 낳겠다고 하면 되겠느냐"고 했다.
◆ 방지일 목사는? 최고령 목회자…개신교 산증인 "닳아질지언정 녹슬지 않겠다"
평북 선천에서 태어난 방지일 목사는 한국 개신교의 산증인이자 100세 현역이다. 평양숭실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평양 대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장대현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했다. 1937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중국 산둥성에 선교사로 나가 20년 이상을 중국 선교사로 분투했다. 1957년 귀국 후에는 영등포교회 담임목사로 일하다 은퇴했고 예장통합 교단장,대한성서공회 이사장 등도 맡았다.
건강비결은 "열심히 심방 다니고 심장이 감동받게 하고,심호흡하는 '삼심'이 전부"라고 말한다. '닳아질지언정 녹슬지 않겠다'는 신조는 그의 지치지 않는 열정과 부지런함을 대변한다. 때문에 부활절 연합예배는 물론 개신교의 크고 작은 행사 때마다 서로 모시려고 한다.
최근 선교사진집을 펴내고는 "이렇게 오래 살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벌써 없어졌을 사람인데 1957년 이후 오늘까지 덤으로 살면서 이렇게 중국에서의 21년간의 그 험악했던 삶을 회상하게 되니 그 감개가 너무 격하다"며 감회에 젖었다.
글/사진=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방 목사가 최근 중국선교 사진집 《중국선교를 회고하며》(홍성사)를 출간했다. 평양 숭실대 영문학과와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방 목사는 1937년부터 21년 동안 중국 산둥성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사진집에는 자신은 물론 1913년 중국으로 파송된 박태로 · 김영훈 · 사병순 목사 등 최초의 선교사 3인과 선친인 방효원 목사 등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사진집 출간을 구실 삼아 방 목사의 거처인 서울 등촌동 실버타운으로 찾아갔다. 꼬박 한 세기를 산 원로 종교인으로부터 어지러운 세상을 밝혀줄 지혜의 말씀을 구하기 위해서다. 방 목사는 다리가 조금 불편하고 귀가 어두워 큰 소리로 말해야 알아듣는 정도 외에는 건강해 보였다. 나지막이 이야기하다가도 강조하거나 농담을 던지고 웃을 땐 목소리가 우렁우렁했다.
▼선교 사진집을 보니 20세기 전반의 고단했던 삶이 담겨 있군요. 당시 중국에서의 생활은 어땠습니까.
"그 어려움이란 일일이 다 말하기 어려워요. 제가 국민당 집권기,일본 점령기,미국 치하,다시 국민당 정권,공산 정권 등 다섯 정권 하에서 선교를 했어요. 일본 점령기에는 같이 선교하자는 일본 사람들의 요구를 거부했다가 반일 · 항일로 몰려 가택수색에다 헌병대로 끌려다니는 등 많은 고초를 겪었죠.그래도 같은 목회자인데 일본 목사들이 저를 고발했을 땐 너무 원망스러워 많이 울었습니다. 공산 치하에서는 종교를 탄압하니 더 말할 것도 없었고요. 사진을 정리하다보니 그때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더군요. "
▼공산당의 탄압을 받을 때에도 중국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던데.
"중국 공산당 정권이 종교를 탄압해 많은 교인이 떠나고 본국과는 연락이 두절돼 아무런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때 중국인들이 배급받은 천으로 옷과 신발을 만들어 밤에 몰래 던져놓고 갔어요. 홍콩으로 추방됐다가 1957년 귀국했을 때 부산 경찰이 제 짐을 조사하더니 성경책 사이에 인민폐 20원을 왜 끼워 갖고 왔느냐고 물었어요. 그만한 돈이면 당시 한 가족 생활비였는데,어떤 분이 내 전송예배 때 몰래 성경에 끼워넣었을 것을 생각하니 정말 눈물이 나더군요. 그땐 정말 우리 모두가 한몸이었습니다. "
▼내년이면 목사 안수 75주년인데 여전히 활동이 많으십니다.
"이젠 많이 걷지를 못해요. 한국 목사 가운데 100살 넘은 사람이 몇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나처럼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사람은 없는 모양입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오라가라 해서 끌려다니는데 구경거리죠,뭐."
▼얼마 전에는 90분 동안 서서 강의하셨더군요. 다리도 불편한데 왜 그러셨나요.
"신학교에서 '원로목사와 만남'이라고 90분씩 강연을 두 차례 했어요. 전부 네 차례 하기로 했지요. 저는 강단에서 탁자에 손을 짚고 강연하는 건 되는데,앉아서 하는 건 아직도 용납이 안 돼요. 대중은 저보다 크잖아요. 제가 100살이지만 50살,40살 되는 사람들이 몇만 있으면 저보다 청중의 나이가 훨씬 많거든요. 그래서 유치원 아이들 앞에서도 앉아서 강의하진 않아요. 무례하잖아요?"
▼1957년 목사님이 귀국한 뒤 한국 교회가 많이 성장했습니다. 그에 따른 부작용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은데.
"사람이 많다고 교회가 커지는 게 아닙니다. 신앙이 커져야죠.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돼야 해요. 수만 명이 모이는 것보다 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이 계셔야 해요. 그런 사람이 필요하지 단지 많은 수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
▼하지만 그게 현실에선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여러 유혹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겐 물욕,명예욕,성욕이 있단 말이죠.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내가 주님 앞에 갈 때에는 그런 게 없어지겠지만,육신이 살아있을 땐 욕심이 살아 있으니 별 수가 없어요. 요새 목사들이 좋지 못한 행동을 한다고들 비판하는데 예수의 제자 가운데에도 예수님을 팔았던 유다가 있었어요. 우리 몸에도 오줌통,똥통이 함께 있잖아요.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속사람과 겉사람이 싸우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날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버리라'고 하신 게 그 뜻입니다. 자기를 이기라는 말씀이죠.신앙의 힘은 거기에 있는 겁니다. "
방 목사는 "신앙적으로 우리는 미완성품"이라고 했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예수님처럼 완성품이 되지는 않으며,단지 완성품이 되려고 애쓸 뿐이라는 얘기다. 그 과정에서 욕망의 유혹에 빠지면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교회가 타락했다고 흔히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의 일이며,교회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방 목사는 지적한다.
▼전에 뵈었을 때 기도에 대해 들려주신 말씀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기도란 내 말이 내 귀에 들릴락 말락해야지,그 이상이면 남에게 방해가 돼요. 요즘 사람들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 소리 높여 '오,주여' 하고 외치는데 이건 남에게 방해만 됩니다. 주님이 귀 잡수셨나요,그렇게 소리치게.내외간에 사랑하는데 남들한테 '나,이 사람 사랑해요. 우리 보세요,입 맞춰요'하고 소문 냅니까. 그냥 남몰래 가서 입맞춰야죠,하하하.하나님도 그렇게 만나는 거예요. "
▼그런데 기도를 왜 하는 겁니까. 뭘 바라면서 기도를 하나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죄입니다. 음란한 짓,도적질,사기 등의 죄를 찾아내는 건 쌀바구니에서 사과 알 고르듯 쉬운 일입니다. 말로 할 수 없는 죄가 있는데,기도는 그런 죄를 찾는 현미경입니다. 가령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고 남을 시기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는 건 사실이거든요. 겉으로는 좋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시기하는 그런 죄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 밉죠."
▼그러면 복을 비는 기도는 어떻습니까.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죄를 자복해야 하나님이 사랑하시게 돼요. 그런데 보통은 예수 믿으면서 아이들 학교 잘 들어가고,장사도 잘되고,내가 편안하고,운전해도 사고 안 나기를 바라죠.그런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긴 하지만 내 마음에서 양심의 자유를 얻는 게 진짜 복입니다. "
▼교회가 배금주의에 물들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를 모시는 걸 과거에는 청빙이라고 했어요. 요새는 목사 자리가 비면 신문에 공고를 내는데 그러면 이력서가 100장,200장,300장씩 들어와요. 장로들이 이력서를 훑어보고 설교 테이프를 들어본 다음 괜찮다 싶으면 지원한 목사더러 교회로 와서 설교를 직접 해보라고 합니다. 그건 청빙이 아니라 고빙(考聘)이죠.하루에 얼마씩 준다,일하러 오라,그렇게 뽑으면 목사가 아니라 삯꾼들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지금도 한 · 미 자유무역협정(FTA) 때문에 국회가 시끄럽습니다.
"민주주의의 원칙은 다수결인데 국회에서 의장석을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앉아서 싸워서야 되겠습니까. 한국 국회는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본이 하나도 못 됩니다. 아이들이 싸우다 '야,여기 국회냐?' 하면 어떻겠습니까. 다들 국익을 우선하지 않고 자기 정당,자기 정권만 생각합니다. 복지정책도 그래요. 무료급식 다 해서 잘된 나라가 있어요? 스웨덴이 그러다가 망할 뻔한 위기를 겪지 않았습니까. "
방 목사는 기자에게 "아이가 몇이냐"고 묻더니 둘이라고 하자 "하나 더 낳으라"고 강권했다. 또 "어머니가 나를 낳기 위해 뱃속에서 붉은 피를 한 드럼통은 흘렸고,낳고 나서는 흰 피(젖)를 그만큼 먹였다"며 "그런 사람들이 아이를 안 낳거나 적게 낳겠다고 하면 되겠느냐"고 했다.
◆ 방지일 목사는? 최고령 목회자…개신교 산증인 "닳아질지언정 녹슬지 않겠다"
평북 선천에서 태어난 방지일 목사는 한국 개신교의 산증인이자 100세 현역이다. 평양숭실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평양 대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장대현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했다. 1937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중국 산둥성에 선교사로 나가 20년 이상을 중국 선교사로 분투했다. 1957년 귀국 후에는 영등포교회 담임목사로 일하다 은퇴했고 예장통합 교단장,대한성서공회 이사장 등도 맡았다.
건강비결은 "열심히 심방 다니고 심장이 감동받게 하고,심호흡하는 '삼심'이 전부"라고 말한다. '닳아질지언정 녹슬지 않겠다'는 신조는 그의 지치지 않는 열정과 부지런함을 대변한다. 때문에 부활절 연합예배는 물론 개신교의 크고 작은 행사 때마다 서로 모시려고 한다.
최근 선교사진집을 펴내고는 "이렇게 오래 살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벌써 없어졌을 사람인데 1957년 이후 오늘까지 덤으로 살면서 이렇게 중국에서의 21년간의 그 험악했던 삶을 회상하게 되니 그 감개가 너무 격하다"며 감회에 젖었다.
글/사진=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