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명왕성에 얽힌 과학의 정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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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출 6년 만에 '非행성' 입증돼…저무는 '미국의 힘' 보는 것 같아
박성래 < 한국외대 과학사 명예교수 >
박성래 < 한국외대 과학사 명예교수 >
명왕성의 퇴출은 유감천만이다. 나와 조금은 관련된(?) 두 사람 때문이다. 한 사람은 명왕성의 발견자 클라이드 톰보(1906~1997)이고,또 한 사람은 그 무대가 된 '로웰천문대'를 만든 퍼시벌 로웰(1855~1916)이다.
1930년 초 23살짜리 조수 톰보는 당시 전 세계가 목매어 찾던 명왕성을 발견해 깜짝 스타가 됐다. 미국 애리조나주의 로웰천문대에서 명왕성을 발견을 한 그는 캔자스주 작은 마을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자작으로 망원경을 만들어 화성과 목성 등을 관측하던 아마추어였다. 그렇게 관측한 그림을 그는 자랑삼아,그리고 평가를 받아보려고 로웰천문대에 보냈다. 천문대가 그를 기특하게 보아 조수로 채용했고,그 자격으로 그는 명왕성을 찾아냈다.
명사가 된 그에게 캔자스대는 장학금을 줘 톰보는 늦깎이 대학생이 됐고,1939년 물리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석사학위를 받은 해에 태어난 나는 꼭 30년 뒤(1969년) 같은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나는 톰보의 30년 후배다. 명왕성의 퇴출로 지금 그의 이름이 희미해지고 있으니 유감이다. 지난 11월7일 만 99세 생일을 지낸 그의 아내 패트리시아도 같은 기분일 듯하다.
톰보가 나 개인의 관심 인물인 것과 달리,로웰은 노월(魯越)이란 한국 이름도 갖고 있는 원조 친한파다. 1876년 조선이 개국하던 해 하버드대를 졸업한 그는 동양의 신비를 찾아 일본에 왔다가,미국에 보낸 조선의 첫 사절단 보빙사(報聘使)의 통역이 된다. 1882년 수호통상조약의 결과 미국 외교관이 들어오자 그 답례로 1883년 7월 이들을 보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민영익을 특명전권공사(보빙사)로,홍영식 서광범 그리고 수행원 5명 등 모두 8명의 청년들이었다.
당시 조선 천지에는 영어를 하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중국인,일본인,그리고 미국인(로웰) 통역 한 명씩이 더해져 모두 11명으로 구성됐다.
로웰은 이듬해 사절단과 함께 일단 귀국했고,1885년 《조용한 아침의 나라,조선》이라는 책을 남겼다. 로웰은 그후 미국에 돌아가 천문학자로 크게 성공했다.
엄청난 부자였던 그는 애리조나주의 플랙스태프(해발 2210m)에 천문대를 만들고,두 가지 일에 몰두했다. 1894년의 화성 접근을 계기로 시작한 화성 연구와 세계적 관심이던 아홉 번째의 행성 찾기였다. 그가 처음 주장한 화성인의 존재는 그후 과학 소설의 단골 메뉴가 됐다. 또 한 가지는 그가 '행성 X'라 명명한 아홉 번째 행성이었다. 천문학자들의 예언에도 불구하고,그 발견은 1916년 그가 세상을 떠난 14년 뒤,그가 만난 일도 없는 톰보에 의해 발견됐다.
유감스러운 것은 명왕성의 퇴출이 꼭 '과학적'이 아니란 인상 때문이다. 원래 명왕성과 같은 크기라는 에리스를 처음 보고한 미국 천문학자는 에리스가 열 번째 행성으로 인정받기 원했고,미국 천문학자 여럿이 명왕성 퇴출에 반대했지만,국제천문연맹은 퇴출을 결정했다. 과학에서도 미국 주도의 세상은 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쩌겠는가? 세상이 조금씩 미국을 몰아내는 추세라면,과학자들이라고 그리 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과학도 알고 보면 상당히 '정치적'이다. 그것 역시 '권력의 배분과 행사'로 좌지우지되는 정치 행위인 것을….
박성래 < 한국외대 과학사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