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향한 진정한 미덕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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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과 떠나는 지식여행
조선 중기 주자학 이끌던 유신환, 예언가로 명성 떨쳤던 조헌 재조명
예지 열광하던 조선 사회 맞서 지성의 길 새롭게 제시
조선 중기 주자학 이끌던 유신환, 예언가로 명성 떨쳤던 조헌 재조명
예지 열광하던 조선 사회 맞서 지성의 길 새롭게 제시
미래는 희미하다. 희미함이란 어두움과 밝음의 합성이다. 어두운 미래는 캄캄한 밤길과 같다. 캄캄한 밤길은 미지의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오늘 아침의 평화가 내일 아침의 평화를 약속하지는 않는다. 변화를 통찰하는 예지(豫知)의 눈빛이 간절하기만 하다. 밝은 미래는 해와 달의 운행과 같다. 오늘 아침에 해가 떴듯이 내일 아침에도 해는 떠오를 것이다. 불변을 기약하는 지성(至誠)의 힘이 미덥기만 하다.
예지의 눈빛과 지성의 힘, 그것은 미래를 향한 두 가지 능력이다. 현재의 밝음이 끝나고 미래의 어두움이 시작될 것을 예언하는 선지자의 능력이나, 미래의 어두움에 다시 현재의 밝음을 일으키기 위해 순도(殉道)도 불사하는 행동가의 능력이나 모두가 소중한 미덕이다.
하지만 둘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중요할까. 조선 중기 유학자 조헌(趙憲·1544~1592)의 문집을 읽은 유신환(兪莘煥·1801~1859)은 예지를 버리고 지성을 택한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유신환이 쓴 《봉서집(鳳棲集)》의 ‘중봉집을 읽고(讀重峯集)’를 보자.
‘내가 일찍이 손님에게 중봉(重峯) 선생이 어떤 사람인지 물어본 적이 있다. “도가 있는 군자입니다.” “그러면 군자가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선생은 일찍이 하늘에 뻗쳐 있는 흰 기운 세 개를 보고는 “왜가 장차 세 길을 나누어 우리를 공격할 것이오”하고 사람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레 같은 소리를 듣고는 “이것은 하늘이 두드리는 소리이오. 오늘 왜가 이미 함선을 출발시켰소. 여러분은 어찌 떠나지 않는 것이오”하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윽고 모두가 선생의 말대로 되었습니다. 무릇 이런 일들이 신통하다면 신통하다 하겠으나 이는 도리어 감석(甘石·천문가를 뜻하는 말)의 무리들이 하는 말입니다. 어찌하여 도가 있는 군자가 감석이 말한 것을 말한단 말입니까.”’
유신환은 이 글 속의 손님이 “선생은 소위 지성(至誠)의 도로 앞날을 알았으나 꼭 감석처럼 그 말을 교묘하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대가 이를 비교해서 똑같이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라고 한 데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성이라는 것은 지극한 성인의 도입니다. 선생은 본디 도가 있는 사람입니다만, 지극한 성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이른바 지성으로 앞날을 안다는 것은 상수(象數)의 설과는 다릅니다. 선생은 일찍이 정여립이 필시 배반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과연 정여립이 배반하였습니다. 현소(玄蘇)가 돌아갈 적에 왜병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현소가 돌아가자 과연 왜병이 왔습니다. 그대는 선생이 지성으로 앞날을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보면 맞고 저렇게 보면 틀립니다. 길 중에서 세 길을 말하고 날 중에서 오늘을 말한 것은 상수의 설이 아닐까요. 나는 말을 교묘하게 하지 않고서 능히 할 수 있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조헌하면 떠오르는 것은 임진왜란이다. 그는 임진왜란을 예언하는 많은 일화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예언가 조헌의 이미지는 점점 증폭됐다. 유신환이 전하는 세 갈래 흰 기운 이야기는 《중봉집》에서 전하는 세 갈래 붉은 기운 이야기가 또다시 변용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이후 조선 사회에는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이나 정감록(鄭鑑錄) 신앙이 확산되면서 사회적으로 예언비기의 감수성이 높아만 가고 있었는데 여기에 비례해 조헌의 이미지도 예언가 쪽으로 강화된 것은 아니었을까. 19세기 중반 한양에서 주자학단을 이끌었던 유신환이 《중봉집》을 읽기 전에 만난 조헌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조헌의 본모습이었을까. 유신환은 《중봉집》을 읽고 예언가 조헌에 가려진 순도자(殉道者) 조헌을 새롭게 발견해냈다. 예지에 열광하는 세속사회의 감수성에 맞서 지성(至誠)의 길을 재조명하려는 비장한 탈세속화의 정신이었다.
정작 흥미로운 것은 유신환 이후다. 고종대에 들어와 조헌은 변화무쌍한 도학자의 모습으로 환생한다. 임진왜란의 불안감을 환기하는 일본과의 위험한 수호조약 체결 당시 최익현은 도끼를 지니고 궁궐에 엎드려 척화를 부르짖었다.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자 일본을 성토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도학자 조헌의 환생이었다.
임오군란 이후 고종은 조헌을 문묘에 종사하는 결단을 내리고 도학과 절의를 겸비한 거룩한 유학자로 조헌을 기념했다. 조선 역사 최후의 문묘 종사였다. 도학자 조헌의 환생이었다. 대한제국기 박은식은 조헌이 여행 중에 길손을 만나면 《격몽요결》을 권하며 적극적으로 유학을 전도했듯이 그러한 방식으로 유교의 체질을 바꾸어야 한다고 부르짖으며 대동교(大同敎)를 창립했다. 도학자 조헌의 환생이었다.
여기서 떠오르는 한 가지 단상. 시대전환기 예언가 조헌에서 도학자 조헌으로의 이미지 변화를 사회적 사실로 입증할 수 있다면 근대이행기 조선사회의 역사적인 변화를 설명하는 인식틀의 하나로 ‘유교적인 계몽주의’를 상정하는 것은 어떨까. 유교는 근대와 함께 다시 환생한 것은 아니었을까.
노관범 가톨릭대 교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www.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지의 눈빛과 지성의 힘, 그것은 미래를 향한 두 가지 능력이다. 현재의 밝음이 끝나고 미래의 어두움이 시작될 것을 예언하는 선지자의 능력이나, 미래의 어두움에 다시 현재의 밝음을 일으키기 위해 순도(殉道)도 불사하는 행동가의 능력이나 모두가 소중한 미덕이다.
하지만 둘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중요할까. 조선 중기 유학자 조헌(趙憲·1544~1592)의 문집을 읽은 유신환(兪莘煥·1801~1859)은 예지를 버리고 지성을 택한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유신환이 쓴 《봉서집(鳳棲集)》의 ‘중봉집을 읽고(讀重峯集)’를 보자.
‘내가 일찍이 손님에게 중봉(重峯) 선생이 어떤 사람인지 물어본 적이 있다. “도가 있는 군자입니다.” “그러면 군자가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선생은 일찍이 하늘에 뻗쳐 있는 흰 기운 세 개를 보고는 “왜가 장차 세 길을 나누어 우리를 공격할 것이오”하고 사람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레 같은 소리를 듣고는 “이것은 하늘이 두드리는 소리이오. 오늘 왜가 이미 함선을 출발시켰소. 여러분은 어찌 떠나지 않는 것이오”하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윽고 모두가 선생의 말대로 되었습니다. 무릇 이런 일들이 신통하다면 신통하다 하겠으나 이는 도리어 감석(甘石·천문가를 뜻하는 말)의 무리들이 하는 말입니다. 어찌하여 도가 있는 군자가 감석이 말한 것을 말한단 말입니까.”’
유신환은 이 글 속의 손님이 “선생은 소위 지성(至誠)의 도로 앞날을 알았으나 꼭 감석처럼 그 말을 교묘하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대가 이를 비교해서 똑같이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라고 한 데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성이라는 것은 지극한 성인의 도입니다. 선생은 본디 도가 있는 사람입니다만, 지극한 성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이른바 지성으로 앞날을 안다는 것은 상수(象數)의 설과는 다릅니다. 선생은 일찍이 정여립이 필시 배반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과연 정여립이 배반하였습니다. 현소(玄蘇)가 돌아갈 적에 왜병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현소가 돌아가자 과연 왜병이 왔습니다. 그대는 선생이 지성으로 앞날을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보면 맞고 저렇게 보면 틀립니다. 길 중에서 세 길을 말하고 날 중에서 오늘을 말한 것은 상수의 설이 아닐까요. 나는 말을 교묘하게 하지 않고서 능히 할 수 있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조헌하면 떠오르는 것은 임진왜란이다. 그는 임진왜란을 예언하는 많은 일화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예언가 조헌의 이미지는 점점 증폭됐다. 유신환이 전하는 세 갈래 흰 기운 이야기는 《중봉집》에서 전하는 세 갈래 붉은 기운 이야기가 또다시 변용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이후 조선 사회에는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이나 정감록(鄭鑑錄) 신앙이 확산되면서 사회적으로 예언비기의 감수성이 높아만 가고 있었는데 여기에 비례해 조헌의 이미지도 예언가 쪽으로 강화된 것은 아니었을까. 19세기 중반 한양에서 주자학단을 이끌었던 유신환이 《중봉집》을 읽기 전에 만난 조헌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조헌의 본모습이었을까. 유신환은 《중봉집》을 읽고 예언가 조헌에 가려진 순도자(殉道者) 조헌을 새롭게 발견해냈다. 예지에 열광하는 세속사회의 감수성에 맞서 지성(至誠)의 길을 재조명하려는 비장한 탈세속화의 정신이었다.
정작 흥미로운 것은 유신환 이후다. 고종대에 들어와 조헌은 변화무쌍한 도학자의 모습으로 환생한다. 임진왜란의 불안감을 환기하는 일본과의 위험한 수호조약 체결 당시 최익현은 도끼를 지니고 궁궐에 엎드려 척화를 부르짖었다.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자 일본을 성토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도학자 조헌의 환생이었다.
임오군란 이후 고종은 조헌을 문묘에 종사하는 결단을 내리고 도학과 절의를 겸비한 거룩한 유학자로 조헌을 기념했다. 조선 역사 최후의 문묘 종사였다. 도학자 조헌의 환생이었다. 대한제국기 박은식은 조헌이 여행 중에 길손을 만나면 《격몽요결》을 권하며 적극적으로 유학을 전도했듯이 그러한 방식으로 유교의 체질을 바꾸어야 한다고 부르짖으며 대동교(大同敎)를 창립했다. 도학자 조헌의 환생이었다.
여기서 떠오르는 한 가지 단상. 시대전환기 예언가 조헌에서 도학자 조헌으로의 이미지 변화를 사회적 사실로 입증할 수 있다면 근대이행기 조선사회의 역사적인 변화를 설명하는 인식틀의 하나로 ‘유교적인 계몽주의’를 상정하는 것은 어떨까. 유교는 근대와 함께 다시 환생한 것은 아니었을까.
노관범 가톨릭대 교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www.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