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위에선 세명의 악사가 연주하고
여인 발치엔 하프의 재료가 된 거북이 두 마리가 기어가고…
'오르페우스의 신화' 바탕…비이성적 세계에 감춰진 진실 담아
▶ QR코드를 찍으면 명화와 명곡을 함께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의 이야기에 대한 고대인들의 입장을 보면 이런 태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먼저 에피소드를 살펴보자. 악사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님프 에우리디체와 결혼했는데 불행하게도 혼례식 때 에우리디체가 사티로스(바커스를 수행하는 반인반수)의 습격을 받아 도망치다가 독사에 물려 죽고 말았다. 깊은 슬픔에 잠긴 오르페우스는 고심 끝에 지하의 저승세계로 내려가 빼어난 하프 연주로 저승세계의 왕 하데스의 마음을 움직여 아내를 데리고 가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낸다. 그러나 지하세계를 빠져나갈 때까지 뒤를 돌아봐서는 절대 안 된다는 하데스와의 약속을 어겨 사랑하는 에우리디체는 영영 지하세계로 사라지고 만다.
오르페우스는 부인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다른 여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아 이에 원한을 가진 메나드(바커스교의 여신도)의 분노를 사 갈기갈기 찢겨져 하프와 함께 강물에 버려졌다고 한다.
이 슬픈 사랑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후대인의 시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곱지만은 않았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오르페우스를 비겁한 존재로 규정했다. 그에 따르면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체를 따라 죽어야 마땅했다. 살고 죽는 것은 운명의 신 소관인 만큼 죽은 자를 살려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사랑하는 이와 다시 만나는 방법은 오로지 스스로의 목숨을 끊음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애인을 따라 죽을 용기가 없으니까 자신도 살고 애인도 살려낼 수 있는 꼼수를 생각해낸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관장하는 하데스 신을 현혹하고 운명의 신을 기만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얄팍한 꼼수는 결국 들통나게 마련이다. 그가 애인을 다시 잃게 되고 자신마저 죽음을 당한 것은 신을 속인 데 대한 준엄한 대가라는 것이다.
신을 농락한 인간의 이야기와 슬프고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가 중첩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의 신화적 에피소드는 그 흥미로운 내용으로 인해 오랫동안 문학, 미술, 음악의 단골소재가 됐다. 그것은 곧 서구인들의 문화적 원형의 압축판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이 주제는 특히 19세기 말 상징주의자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상징주의자들은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본 인상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발해 신화와 전설, 인간 내면의 상상의 세계 등 현실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화면에 담고자 했다. 오르페우스 신화가 이들의 구미를 당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딜롱 르동, 모리스 드니 등 많은 화가들이 자신의 캔버스에 이 불행한 악사의 에피소드를 담았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명품은 상징주의의 원조인 귀스타브 모로(1826~98)의 ‘오르페우스’였다.
화면을 보면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상념에 잠긴 한 메나드가 거북의 등딱지에 찢겨진 오르페우스 머리를 결합해 만든 하프를 바라보고 있다. 주신(酒神) 바쿠스를 따르며 술에 취해 감정이 극에 달할 때면 잔인하게 짐승을 물어뜯는 이 매력적인 여인은 의외로 차분한 표정이다.
보는 이의 상념을 자아내는 이 로맨틱한 광경은 비현실적인 배경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산악 위에는 세 명의 악사가 악기를 연주하고 있어 살아생전의 오르페우스를 떠올리게 하고 오른쪽 하단에 대칭을 이루고 있는 두 마리의 거북은 메나드가 들고 있는 하프의 재료가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레오나르도 다빈치 작품 속의 신비로운 풍경을 연상케 하는 음울한 분위기의 산악은 대각선으로 화면을 양분하고 있고,산악 뒤의 하늘은 금빛 노을로 물들어 있고 석양에 반사된 지표면 역시 금빛을 띠고 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이 작품이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명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데는 바로 상징주의자들이 모토로 삼았던 비이성적 세계의 상상적 탐구에 힘입은 바 크다. 덕분에 오르페우스는 죽어서도 자신의 아름다운 연주를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게 됐고 관객은 모로가 개척한 새로운 신화의 세계로 들어가는 로맨틱한 초대장을 받게 됐다. 예술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지 않은가.
◆ 명화와 함께 듣는 명곡 -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
귀스타브 모로의 ‘오르페우스’를 보고 마음이 울적해졌다면 글룩의 음악에서 위안을 받는 건 어떨까.
모로의 그림이 전통적인 신화의 비극적 에피소드에 바탕을 둔데 비해 글룩(1714~1787)의 오페라 ‘오프레우스와 에우리디체’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의 에피소드에서 오르페우스가 뒤돌아 본 순간 에우리디체가 다시 저승의 나락으로 떨어진 반면 글룩의 오페라에서는 오르페우스의 좌절을 안타깝게 여긴 사랑의 여신이 에우리디체를 다시 이 가련한 젊은이에게 되돌려준다.
1762년 빈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아리아 중심의 오페라 전통을 깨고 극과 음악을 일치시켜 오페라의 새 방향을 제시한 작품이다.
모두 3막으로 이뤄진 이 작품에는 주옥같은 아리아와 오케스트라 연주가 많아 오늘날에도 오페라 마니아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제1막의 아리아 ‘사랑하는 이여, 밤이 밝기 전에 내게로 돌아오라’, 제3막 도입부의 아름다운 연주 ‘정령들의 춤’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고 특히 제3막의 아리아 ‘오, 나의 에우리디체를 돌려주오’는 그 애절한 멜로디가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사랑의 여신이 어찌 마음을 돌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석범 문화전문기자ㆍ미술사학박사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