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오다, 끌어내라.” “겁쟁이, 매국노.”

지난 26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집회가 열렸던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 이날 오후 9시35분께 박건찬 종로경찰서장이 야당 대표들과 면담하기 위해 시위대 인파 속으로 들어가자 여기저기서 욕설과 고성이 터져 나왔다. 박 서장을 조현오 경찰청장으로 착각한 시위대가 욕설과 함께 박 서장을 끌어내려고 하자 그를 보호하던 사복 차림의 경찰관 10여명이 서로 휩쓸리며 몸싸움이 시작됐다. 박 서장은 입 주변을 정통으로 맞아 윗입술이 부풀어 올랐고 안경이 부서졌다. 시위대는 박 서장의 모자를 벗기고 계급장을 떼내기도 했다. 박 서장 일행은 간신히 빠져나와 전속력으로 세종로 사거리를 가로질러 시위대의 추격을 뒤로 한 채 태평로파출소로 피신했다.

불법·폭력 집회를 막아야 할 경찰이 오히려 시위대에 폭행당하고 도망치는 게 오늘날 대한민국 공권력의 현주소다. 이날 경찰서장까지 시위자들에게 폭행을 당한 건 ‘공권력이 매 맞는 현상’의 일각일 뿐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말로만 불법 집회 근절을 내세웠던 정부의 미봉책이 이 같은 현상에 한몫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불법 집회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도 연간 3조원이 넘는다.

○두루뭉술한 집시법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발생한 불법·폭력시위는 33건이다. 쇠고기 광우병 사태로 촛불집회가 일어났던 2008년(89건) 이후 계속 줄어드는 추세였다. 그러나 올 들어 지난 10월까지 발생한 불법·폭력시위는 36건으로, 지난해 전체 발생건수를 이미 뛰어넘었다.

올 들어 불법·폭력시위가 늘어나면서 진압 도중 부상당하는 경찰들도 많아졌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시위 도중 부상당한 경찰이 18명이었던 데 반해 올 들어 지난 10월까지는 7배가 넘는 130명에 달한다.

이처럼 공권력이 불법 집회 참가자들에게 매 맞게 된 이유가 뭘까. 한 경찰 관계자는 “경찰이 2008년 촛불시위 이후 ‘공권력의 상징’이란 위상을 거의 다 잃다시피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현 정부 출범 직후 전국을 뒤흔든 미국산 쇠고기 촛불집회를 진압하면서 경찰에 대한 적대감이 광범위하게 퍼졌다는 얘기다. 일선 경찰관들이 취객들에게 얻어맞는 건 일상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두루뭉술한 집회·시위법 때문이라는 게 경찰 안팎의 분석이다.

집시법 시행령 제17조(집회·시위의 자진해산 요청 등)에 따르면 경찰이 집회 종결선언을 요청하려면 주최자에게 요청하거나 주관자, 연락책임자, 질서유지인을 통해야 한다. 종결선언에 응하지 않을 경우 자진해산을 요청할 수 있다. 이마저도 세 차례 이상 자진해산을 요청했다가 응하지 않을 경우 직접 해산시킬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처럼 과정이 복잡하다 보니 불법 집회라 할지라도 신속하게 집회를 해산시키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불법 시위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 사실상 불가능한 셈이다.

○말로만 엄포…“걸려도 솜방망이”

집시관련 법령의 구조적인 허술함을 고쳐야 하지만 “불법 집회·시위로 걸려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는 인식도 문제다. 경찰은 지난 10일 한ㆍ미 FTA 반대 집회에서 경찰기동대 팀장인 전모씨가 구타당하자 전담수사팀까지 꾸렸지만 아직 범인을 잡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1년 6월 정선모 동대문경찰서장이 집회 현장을 지휘하다 바닥에 넘어져 실신하기도 했다. 민주노총 대외협력국장 박모씨는 정 서장을 잡아채 뒤로 넘어뜨린 혐의로 기소됐지만 1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실형을 면했다.

경찰은 지난 9월 도심 주요 도로를 장시간 무단 점거하거나 질서유지선(폴리스라인)을 훼손하면 강경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전국 일선 경찰서에 불법 집회에 적극적으로 물포를 사용하라는 내용의 가이드라인도 내려보냈지만 불법 집회·시위는 근절되기는커녕 오히려 증가세다.

○경제적 손실 연간 3조원 넘어

불법·폭력 집회는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손실을 가져온다. 2009년 경찰청이 차성민(한남대 법학과)·강신원(순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팀에 의뢰해 발표한 ‘법질서 확립이 미치는 경제적 파급효과에 관한 연구 보고’에 따르면 불법집회 1회당 사회·경제적 비용은 910억원에 달한다. △시위 참가자의 생산 손실 △경찰 투입에 따른 공공비용 △시위 현장 주변 사업체의 영업 손실 △통행시간, 연료비 증가 및 대기오염 등을 모두 합친 것이다.이 기준에 따르면 올 들어 발생한 불법폭력집회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은 3조2760억원에 달한다. 이달 들어 FTA 반대 집회가 본격화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손실은 더욱 불어날 전망이다.

김선주/강경민 기자 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