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政爭에 발목잡힌 한국형 IB
“한국의 신용등급이 이탈리아보다 좋았던 적이 있었던가요?” 장승철 하나대투증권 투자금융(IB)부문 사장은 ‘한국형 글로벌 IB’라는 해묵은 주제를 꺼내자 이렇게 반문했다. IB라는 게 신용 장사인데 미국, 유럽의 금융이 흔들리고 있는 요즘이 한국 IB로선 절호의 기회라는 얘기였다.

한국에 출장 온 천병규 우리투자증권 홍콩법인 이사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1~2년 전만 해도 BNP파리바 등 유럽계 증권사와 파생상품 거래를 하려면 달러를 담보로 요구했는데, 지금은 담보가 필요 없어졌다”고 전했다. ‘선수 대접’을 해주기 시작했다는 설명이었다. 천 이사는 “(미국·유럽으로 상징되는) 글로벌 금융시장의 앙시앙 레짐(ancient regime·옛 체제)이 무너지고 있다”고까지 말했다.

요즘 아시아 금융시장의 허브인 홍콩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곳도 한국계다. 크레디트스위스가 채권 데스크를 통째로 날리며 60여명을 대량 해고했고, 골드만삭스도 감원 열풍에 휘말리고 있지만 한국 증권사들은 오히려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우리투자증권은 인재를 구하기 위해 임원들이 이번 주 중 홍콩행 비행기에 오른다. 내년엔 홍콩법인의 인력을 두 배로 늘릴 계획이다. 삼성증권은 최근 현지 인력을 대거 채용해 150여 명 규모로 홍콩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국내 IB업계에 진정 봄이 온 것일까. 전문가들은 정서적, 제도적인 면에서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입을 모은다. 월가에서 시작된 반(反)금융 정서가 서울에서도 유령처럼 번지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외국 금융자본의 한국 진출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상황에서 글로벌 IB라는 주제는 뒷전에 밀릴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자본시장통합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될지 불투명한 것도 이 같은 정서를 반영한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국내 대형 증권사를 골드만삭스 같은 글로벌 IB로 키우기 위해 제도적으로 필요한 것을 지원해 주는 것이 골자인데, 정쟁 탓에 뒷전으로 밀려난 상황이다. ‘선수’들은 뛸 준비가 돼 있지만 연습할 구장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한 증권사 임원은 이런 상황을 보면 ‘못다 핀 꽃한송이 피우리라’라는 흘러간 옛 노랫말이 떠오른다고 했다.

박동휘 증권부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