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가 별 거냐… 매너리즘 화가들 반격
작가는 일반인보다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다. 그들은 조그마한 환경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16세기 전반 피렌체에서 탄생한 매너리즘 미술은 그런 예술가와 시대상황의 함수관계를 잘 보여주는 예다. 당시 피렌체는 위대한 지도자 로렌초의 사망과 프랑스 왕 샤를8세의 침략, 가톨릭 근본주의로의 회귀를 제창한 사보나롤라의 가톨릭 반동정권 등장, 메디치가의 복귀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5세의 이탈리아 침략 등 정치적, 종교적 불안이 끊일 새 없었다. 격변의 상황 속에서 화가들은 마음 기댈 곳을 잃었다.

여기에 더해 또 하나의 부담감이 화가들의 어깨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위대한 선배들에 의해 정점에 도달한 회화는 너무나 완벽한 사실적 재현의 경지를 이뤄내 후배 화가들이 덧붙일 여지가 전무한 상황이 됐다.

그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역할은 선배들의 업적을 앵무새처럼 읊조리는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화필을 던질 수는 없는 일. 후배들은 선배들이 이뤄놓은 사실적 재현의 전통에 반기를 들고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매너 혹은 스타일)에 따라 그리기로 작정한다. 후대에 이들의 미술을 ‘매너리즘’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들이 자신만의 개성적인 스타일에 따라 그렸기 때문이다.

안팎에서 가해지는 스트레스는 매너리즘 작가들을 정신적 파탄으로 몰고 갔다. 로소 피오렌티노(1494~1540)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거의 끊은 채 원숭이와 함께 살았는데 사람들은 그가 밤마다 묘지를 파헤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푸르뎅뎅한 피부와 악마적인 인상은 그런 소문을 확대재생산하는 빌미를 제공하고도 남았다.

그의 대인기피증은 사람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다. 말년에 프랑스 퐁텐블로 궁전의 실내장식 책임자로 일할 때는 자신의 충실한 친구인 펠레그리노를 절도죄로 고발했는데 친구의 결백이 밝혀지자 자책감을 못 이겨 죽고 말았다.

폰토르모(1494~1557)의 기벽은 피오렌티노보다 한술 더 떴다. 그 역시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렸는데 대문을 아예 자물쇠로 채우고 자기 집을 사다리를 타고 들락거린 괴짜였다. 어느 방문자도 사다리를 타는 행운을 잡지 못했다. 그는 평생을 고독과 죽음에 대한 공포, 그에 따른 우울증에 시달렸다. 여인과 사랑을 나눈 적도 없었고 음식도 직접 만들어 먹었다.

작품 역시 심리 상태를 반영하듯 등장인물의 자세와 표정은 불안감으로 똘똘 뭉친 듯한 인상이다.

매너리즘 작가들은 당대에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고 그들의 죽음과 함께 오래도록 대중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이 괴짜들이 재평가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사실적 재현의 전통이 막다른 길에 도달했을 때 매너리즘 미술은 현대미술의 전위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됐다. 예술상의 진보는 예술가의 불행을 먹고 자라는 것일까.

정석범 문화전문기자·미술사학 박사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