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체 정책을 총괄하는 방송통신위원회가 헤매고 있다. 정책의 철학이 없고,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새로운 매체가 출현할때마다 방송 공익성과 같은 이념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가 있었다. 매체간 균형 발전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있었다.

그러나 2008년 설립된 방통위는 종합적인 매체 정책 없이 소방수 불끄기식으로 대처하며 허둥대고 있다. 제대로 기능하는 방통위라면 현재 연이어 터지고 있는 매체 이슈들에 대해 정책안들을 밝히고, 여론을 수렴하면서 녹서나 백서를 발간하는 등 노력을 보여야 한다.

지상파 재전송, 종합편성채널사용사업자의 등장, 미디어렙 그리고 방송·통신 융합 등 굵직한 사안들이 산적해 있다. 방통위는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거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전문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지상파재전송 문제는 급기야 지난 28일 종합유선방송사들이 지상파 디지털방송(HD)을 중단하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말았다. 내년 말 아날로그 방송 종료를 앞두고 말이다. 방통위의 지상파재전송 정책과 분쟁 조정 기능의 한계를 보여준 사건이다.

신생 종편 사업자를 살리겠다고 그동안 힘들게 버텨온 개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종편 사업자들을 위해 전문편성 사업자들을 위기에 빠뜨리는 정책은 전문 편성이 특징인 케이블TV 도입의 역사성을 망각한 것이다. 방송의 다양성이 크게 훼손될 것으로 예상된다. 종편 사업자 편중 정책에 대해 기존 방송사는 물론, 종편 사업에 참여하지 않은 신문사, 심지어 시민단체들까지 반발하고 나서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허가 받은 무료 지상파방송사들의 의무재전송은 이루어지지 않는데 반해, 허가제보다 진입 장벽이 낮은 승인제를 적용한 4개나 되는 상업적 유료 종편 사업자들의 재전송을 의무화하고 있는 점은 모순이다. 상업 채널의 전송을 의무화하는 것은 위헌의 소지가 높기에 현행 방송법은 시급히 개정되어야 한다.

종편 사업자가 출범하기 이전에 미디어렙 제도의 정비는 필수적이었다. 공식적인 정책 보고서 한번 발표하지 않고 30년된 제도를 바꾼다는 점에서 절차적 정당성이 크게 결여됐다. 정부와 여당이 잘못 판단했고, 이제는 실기한 것 같다. 종편 사업자의 직접 광고 영업 허용은 매체 시장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SBS가 직접 영업을 준비하고 있고, MBC까지도 가세했다. KBS와 EBS도 자신들만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를 통해 간접 광고 영업을 하는 불이익을 감수할 것 같지는 않다. 봇물 터진 시장의 힘은 정부가 막기에 너무 드세다.

영세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들은 설상가상으로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로 인한 외국 기업들의 국내 진출과 시청률 경쟁으로 큰 위기에 빠질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방송 제작 기반의 붕괴가 우려된다. 2007년 한ㆍ미 FTA 협상 타결직후, 구 방송위원회가 “영세 PP들을 위한 지원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던 약속을 방통위는 지켜야 한다.

방송과 통신의 융합에 대비하기 위해 방통위가 출범했다. 그러나 방송통신기본법만 제정해 놓고 방송통신사업법이 제정되지 않아 유명무실한 반쪽짜리 법이 되고 말았다. 방통위는 방송통신사업법의 제정 가능성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어렵게 옛 정보통신부와 방송위를 통합한 취지를 무색케 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의 근본 원인은 전문성이 아니라, 정치성을 고려해 방통위 위원들을 선임했기 때문이다. 그 피해는 시청자들과 사업자들에 돌아가고 있음을 시장이 증명하고 있다.

이상식 < 계명대 언론영상학 교수 / 객원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