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봇대'는 살아있다] 90㎡ 창고 짓는데…"19만㎡ 공장 전체 용도변경 절차 밟아라"
충남 천안에 있는 L기업 총무팀의 김모 과장. 그는 몇 해 전 원자재 보관 공간을 마련하라는 회사 방침에 따라 90㎡(27평) 규모의 창고를 지으려다 황당한 경험을 했다. 기존 공장 부지에 조그만 창고 하나 만드는 일이라 만만하게 봤는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김 과장은 이 일을 위해 19개의 첨부서류와 도면을 준비해야 했다. 인허가 비용도 창고건축비(500만원)의 4배인 2000만원이 넘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사연은 이랬다. 인허가를 담당하는 해당 지방자치단체는 전체 공장 부지 18만5000㎡(5만6000평) 중 일부 용도를 창고로 바꾸는 절차를 다시 밟으라고 요구했다. 아무리 작은 창고라 하더라도 이미 허가받은 건축물 배치에 변화가 생긴다는 게 이유였다. 근거는 국토이용에 관한 법률(24조)이었다.

담당 관청 입장에선 관할 구역의 부지를 조각조각 들여다 보지 않고 전체적으로 관리하는 게 맞지 않느냐는 논리도 곁들였다. 전형적인 탁상행정이자 공급자 중심의 발상이었지만 김 과장은 하는 수 없이 그 방침을 따라야 했다.

['전봇대'는 살아있다] 90㎡ 창고 짓는데…"19만㎡ 공장 전체 용도변경 절차 밟아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소형 주택 크기의 창고 하나 세우는 일이 창고 면적의 2000배가 넘는 대규모 공사와 비슷한 계획이 됐기 때문이다. 김 과장은 곧바로 공장 완공 때 서류를 뒤적였다. 서류 찾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공장을 준공한 게 1990년이어서 서류가 온전히 남아있는 게 거의 없었다.

결국 모든 걸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전체 공장의 조감도 등 각종 설계도면을 다시 만들고 서류를 갖추는 데만 꼬박 20일 걸렸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건축물 배치나 건축선 등에서 전체 부지에 대한 지구단위계획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좀체 허가가 나지 않았다. 다시 이런저런 서류를 갖추는 데 열흘 가까운 시간을 투자해 기존 지구단위계획을 변경하고 나서야 재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진을 빼고 막상 창고를 짓는 데는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3일 안에 500만원이면 처리될 일을 한 달 넘게 2000만원이 넘는 돈을 쓰고서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전문가들은 “지금도 산업현장에선 이런 비효율이 부지기수로 발생한다”며 이를 막기 위해선 이미 허가받은 공장부지 내에 소규모 시설물을 신·증축할 경우 간단한 허가 신청이나 신고만 거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임상혁 전국경제인연합회 산업본부장은 “예컨대 같은 필지의 건축 행위에 대해 건축법과 국토계획법 규정이 다르면 기업들의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고 정책 일관성 측면에도 문제가 있다”며 “법 규정을 서로 모순되지 않게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 갈라파고스 규제

다른 곳에는 없고 특정 지역에만 있는 규제. 현실과 동떨어진 규제라는 뜻으로 흔히 쓴다. 남태평양의 갈라파고스 제도가 육지로부터 고립돼 고유한 생태계를 구축한 것과 비슷해 생긴 말이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