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 프란체스코 '무소유 정신'…세속ㆍ권력화된 교회에 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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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영성의 심장(下) - 이탈리아 아시시 작은형제회
부유한 삶 버리고 청빈 실천…'아시시의 예수'로 추앙
부유한 삶 버리고 청빈 실천…'아시시의 예수'로 추앙
그는 젊은 시절 ‘오렌지족’이었다. 부유한 포목상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값비싼 옷을 즐겨 입었고 파티를 자주 즐겼다. 그러던 그가 변했다. 돈도, 안락한 생활도 모두 버렸다. 상속권도 포기했다. 반대하는 아버지에겐 입고 있던 옷마저 모두 벗어 반납하고 알몸으로 거리로 나섰다. 소비와 향락에 물든 세상, 가난한 이를 돌보지 않은 채 권력화된 교회를 향해 그는 “단순하고 가난하게 살자”고 외쳤다. 중세의 기독교 성인 프란체스코 베르나르도네(1182~1226)였다.
성 프란체스코를 만나러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주 페루자현의 작은 도시 아시시로 향했다. 로마에서 차를 타고 북쪽으로 3시간쯤 달리자 해발 424m의 스바시오산 중턱에 자리잡은 아시시가 보인다. 먼저 아시시 남쪽 교외에 있는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부터 찾았다.
프란체스코는 도시국가들이 대립하고 십자군 원정이 한 세기나 진행되던 시기에 태어났다. 기사가 되고자 했던 프란체스코는 전쟁터로 향하던 중 “주인과 종 가운데 누구를 택하겠느냐?”는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다. 여기서 종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부귀영화요, 주인은 영원한 평화와 행복이다.
전쟁터 대신 아시시로 돌아온 프란체스코는 달라졌다. 그는 동굴에서 기도하고 회개했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우연히 마주친 한센병 환자들은 회심(回心)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들의 가련한 삶 속에 살아 있는 가난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다.
프란체스코는 “쓰러져가는 나의 집을 수리하라”는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소명을 확인한다. 수리할 대상은 교회 건물이 아니라 신앙과 삶 자체였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하느님이라는 한 아버지 아래 형제라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을 낮추는 마음의 가난과 일체의 소유를 배제한 물질적 가난, 모든 피조물을 섬기는 겸손의 삶을 지향했다.
프란체스코는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성 밖의 버려진 땅에 갈대와 진흙으로 움막을 짓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천사들의 성모마리아 대성당’은 그 자리에 세운 성당이다. 성당 안에 들어서자 또 하나의 성당이 있다. 프란체스코와 동료들이 세웠던 작은 성당 ‘포르치운콜라(Porciuncola)’다. 포르치운콜라는 ‘작은 몫’이라는 뜻. 움막의 프란체스코 형제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작은형제회’를 탄생시켰다.
프란체스코가 임종한 장소에는 그가 마지막까지 입었던 수도복의 허리에 둘렀던 끈이 유리함 안에 보존돼 있는데 끈에 표시된 세 개의 매듭은 작은형제회가 지향하는 청빈과 정결, 순명(順命)을 상징한다.
성당 뒤편에 있는 목조 성 프란체스코상에는 바구니 안 하얀 비둘기 한 쌍이 항상 성인 곁을 지키고 있다. 성당 정원에는 들개와 노니는 프란체스코상이 ‘가시 없는’ 장미와 함께 서 있다. 모든 피조물을 섬겼던 프란체스코는 날짐승, 들짐승에게도 설교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이제 아시시 언덕으로 오를 차례다. 산 꼭대기 요새 아래 아시시의 주거·상업지역이 비스듬히 길게 형성돼 있는데 동쪽 끝의 성녀 클라라 성당부터 찾았다. 성 프란체스코가 교리공부를 했던 이곳에는 그의 영적 동반자였던 성녀 클라라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성녀의 유해는 수백년이 지나서도 썩지 않은 채 발견됐고 얼굴과 손 등 일부 훼손된 부분만 세라믹으로 복원했다. 유해 맞은편에는 성녀의 머리카락과 신발, 허리끈, 성녀와 성인의 수도복 등이 낡은 모습으로 전시돼 있다.
클라라 성당에서 나와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으로 가는 2㎞가량의 길은 중세로의 시간 여행이다. 좁은 옛길을 지나며 몇 차례 성문을 거쳐야 한다. 길 옆 상점에는 프란체스코와 관련된 성물(聖物)과 기념품이 즐비하다. 프란체스코가 예수처럼 말구유에서 태어난 곳에는 작은 성당이 들어섰다. 나무 문짝 하나만 남은 그의 아버지 가게 위에는 키에사 누오바(Chiesa Nuova) 성당이 세워져 있다.
마침 이 성당 앞에서 작은형제회의 수사들과 마주쳤다. 이 성당의 수도원장인 프란체스코 데 라자리 신부(68)와 구알 티에로 신부(67)였다. 이들은 “사람들은 이 세상이 잠깐 들러 지나가는 곳임을 모른 채 돈과 권력에 집착하지만 그것은 순간일 뿐”이라며 “날마다 일상의 단순함에서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것이 프란체스코 형제들의 삶”이라고 설명했다.
아시시의 서쪽 언덕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은 꼰벤뚜알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본원이다. 원래 사형장이었던 터라 ‘지옥의 언덕’으로 불리던 곳인데 성 프란체스코는 골고다 언덕이 연상되는 이곳에 묻히기를 원했다.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은 지하 무덤과 1층 성당, 2층 성당으로 구성돼 있는데 지하무덤 가운데 기둥의 석관에 성인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1층 성당에는 여러 개의 소성당, 성모 마리아와 성 프란체스코의 벽화 등이 있고 2층 성당은 새들에게 설교하는 장면 등 성 프란체스코의 삶과 영성을 지오토가 그린 프레스코화 28점으로 장식돼 있다.
성 프란체스코는 예수를 닮고자 했고 그렇게 살았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를 ‘아시시의 예수’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방법은 간단했다. 무소유와 겸손, 그리고 사랑이었다.
아시시=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성 프란체스코를 만나러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주 페루자현의 작은 도시 아시시로 향했다. 로마에서 차를 타고 북쪽으로 3시간쯤 달리자 해발 424m의 스바시오산 중턱에 자리잡은 아시시가 보인다. 먼저 아시시 남쪽 교외에 있는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부터 찾았다.
프란체스코는 도시국가들이 대립하고 십자군 원정이 한 세기나 진행되던 시기에 태어났다. 기사가 되고자 했던 프란체스코는 전쟁터로 향하던 중 “주인과 종 가운데 누구를 택하겠느냐?”는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다. 여기서 종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부귀영화요, 주인은 영원한 평화와 행복이다.
전쟁터 대신 아시시로 돌아온 프란체스코는 달라졌다. 그는 동굴에서 기도하고 회개했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우연히 마주친 한센병 환자들은 회심(回心)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들의 가련한 삶 속에 살아 있는 가난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다.
프란체스코는 “쓰러져가는 나의 집을 수리하라”는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소명을 확인한다. 수리할 대상은 교회 건물이 아니라 신앙과 삶 자체였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하느님이라는 한 아버지 아래 형제라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을 낮추는 마음의 가난과 일체의 소유를 배제한 물질적 가난, 모든 피조물을 섬기는 겸손의 삶을 지향했다.
프란체스코는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성 밖의 버려진 땅에 갈대와 진흙으로 움막을 짓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천사들의 성모마리아 대성당’은 그 자리에 세운 성당이다. 성당 안에 들어서자 또 하나의 성당이 있다. 프란체스코와 동료들이 세웠던 작은 성당 ‘포르치운콜라(Porciuncola)’다. 포르치운콜라는 ‘작은 몫’이라는 뜻. 움막의 프란체스코 형제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작은형제회’를 탄생시켰다.
프란체스코가 임종한 장소에는 그가 마지막까지 입었던 수도복의 허리에 둘렀던 끈이 유리함 안에 보존돼 있는데 끈에 표시된 세 개의 매듭은 작은형제회가 지향하는 청빈과 정결, 순명(順命)을 상징한다.
성당 뒤편에 있는 목조 성 프란체스코상에는 바구니 안 하얀 비둘기 한 쌍이 항상 성인 곁을 지키고 있다. 성당 정원에는 들개와 노니는 프란체스코상이 ‘가시 없는’ 장미와 함께 서 있다. 모든 피조물을 섬겼던 프란체스코는 날짐승, 들짐승에게도 설교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이제 아시시 언덕으로 오를 차례다. 산 꼭대기 요새 아래 아시시의 주거·상업지역이 비스듬히 길게 형성돼 있는데 동쪽 끝의 성녀 클라라 성당부터 찾았다. 성 프란체스코가 교리공부를 했던 이곳에는 그의 영적 동반자였던 성녀 클라라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성녀의 유해는 수백년이 지나서도 썩지 않은 채 발견됐고 얼굴과 손 등 일부 훼손된 부분만 세라믹으로 복원했다. 유해 맞은편에는 성녀의 머리카락과 신발, 허리끈, 성녀와 성인의 수도복 등이 낡은 모습으로 전시돼 있다.
클라라 성당에서 나와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으로 가는 2㎞가량의 길은 중세로의 시간 여행이다. 좁은 옛길을 지나며 몇 차례 성문을 거쳐야 한다. 길 옆 상점에는 프란체스코와 관련된 성물(聖物)과 기념품이 즐비하다. 프란체스코가 예수처럼 말구유에서 태어난 곳에는 작은 성당이 들어섰다. 나무 문짝 하나만 남은 그의 아버지 가게 위에는 키에사 누오바(Chiesa Nuova) 성당이 세워져 있다.
마침 이 성당 앞에서 작은형제회의 수사들과 마주쳤다. 이 성당의 수도원장인 프란체스코 데 라자리 신부(68)와 구알 티에로 신부(67)였다. 이들은 “사람들은 이 세상이 잠깐 들러 지나가는 곳임을 모른 채 돈과 권력에 집착하지만 그것은 순간일 뿐”이라며 “날마다 일상의 단순함에서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것이 프란체스코 형제들의 삶”이라고 설명했다.
아시시의 서쪽 언덕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은 꼰벤뚜알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본원이다. 원래 사형장이었던 터라 ‘지옥의 언덕’으로 불리던 곳인데 성 프란체스코는 골고다 언덕이 연상되는 이곳에 묻히기를 원했다.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은 지하 무덤과 1층 성당, 2층 성당으로 구성돼 있는데 지하무덤 가운데 기둥의 석관에 성인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1층 성당에는 여러 개의 소성당, 성모 마리아와 성 프란체스코의 벽화 등이 있고 2층 성당은 새들에게 설교하는 장면 등 성 프란체스코의 삶과 영성을 지오토가 그린 프레스코화 28점으로 장식돼 있다.
성 프란체스코는 예수를 닮고자 했고 그렇게 살았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를 ‘아시시의 예수’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방법은 간단했다. 무소유와 겸손, 그리고 사랑이었다.
아시시=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