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의 한 상품개발자는 특정 스포츠경기 결과에 따라 금리를 얹어주는 조건부 금리 예금상품을 힘들게 개발했으나 휴지통에 버려야 했다. 금융감독원에서 ‘사행심을 조장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방식의 프로야구예금이 있는 국민은행도 내년부터 상품 내용을 바꿀 예정이다.

“은행 이름을 밝히면 큰일난다”고 신신당부한 그는 “결과를 맞힌 일부에만 추가금리를 주는 것은 경품행사와 비슷한 마케팅이어서 문제 없다고 내부적으로 판단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금융은 ‘규제 지뢰밭’의 정점에 서있는 산업이다. 워낙 규제가 일상화되다 보니 금융회사 사람들조차 규제를 ‘전봇대’로 인식하지 않는다. “금융시장에서 규제는 (길을 가로막는) 전봇대라기보다 (길을 알려주는) 표지판에 가깝다”고 금융사 임원이 자조할 정도다.

민원이 많은 대표적인 규제가 약관심사다. 대부분의 금융상품은 비슷비슷한 약관을 갖고 있지만 금융회사를 믿지 못하는 금감원에서 모든 상품을 일일이 심사하는 탓에 약관 승인에만 몇 달씩 걸리기 일쑤다. 한 카드사 임원은 “신상품을 신청했는데 대기표가 150번이었다”며 “3~4개월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고 전했다.

책임추궁을 피하기 위해 ‘증거’ 문서를 남기기 않는 관행도 비정상적이다. 대신 임직원을 불러 말로 지시하는 ‘구두’ 규제가 대부분이다.

금융사들은 ‘불합리하다’고 느껴도 무조건 따르고 본다. 후환이 두려워서다. 지난 8월 농협을 비롯해 신한 ·우리은행 등이 ‘가계대출 증가율을 월 0.6% 한도 내에서 관리하라’는 금융위원회의 구두 지시에 신규 대출을 전격 중단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불합리한 규제를 시정하는 데도 오래 걸린다. 10년 전 산업자본을 분류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산 2조원’ 조항이 그런 경우다.

금융위 관계자는 “당시 산업자본으로 분류된 30대 그룹을 줄세워서 제일 마지막 회사가 2조원 정도여서 2조원으로 정했다”며 “지금으로선 비현실적인 수치”라고 했다. 자산 2조원 이상의 상장사만 137곳에 이르기 때문이다. 금융위 다른 관계자는 “자산 비율 등으로 기준을 바꿔야 한다”면서도 “국회 통과가 쉽지 않아 손도 못 대고 있다”고 전했다.

안경점·미용실 등을 ‘사치업종’으로 규정한 카드 수수료율 체계가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도 금융 전봇대의 또 다른 사례다. 이로 인해 안경점은 골프장보다 비싼 수수료를 물고 있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