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活字 주조'는 국가 프로젝트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출판과 인쇄문화가 발달했다. 고려 후기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해 1234년 《상정고금예문》을 인쇄하고 1377년 금속활자로 《직지심체요절》을 간행한 것은 고려시대 인쇄문화의 우수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011년 대장경이 처음 간행돼 올해로 대장경 간행 1000년을 맞이한 것 역시 인쇄, 출판문화의 저력을 잘 보여준다.

조선왕조 역시 건국 직후부터 교육 진흥에 역점을 두었고 이것은 활자인쇄술과 제지술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조선 초기에는 태종대인 1403년에 계미자(癸未字), 1407년 정해자(丁亥字), 1421년 경자자(庚子字), 1434년에 갑인자(甲寅字)가 주자소에서 주조됐다.

활자를 만드는 데 사용한 금속은 처음에는 구리였으나 세종 18년부터는 납을 쓰기 시작했다.

또 세종대에는 식자판(植字板)을 조립하는 방법을 창안, 종전보다 두 배 정도로 인쇄 능률을 올렸다. 조선 성종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성현(成俔·1439~1504)은 그의 저술 《용재총화》(권7)에서 조선 전기 활자인쇄술의 발달 경위와 구체적인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태종께서 영락(永樂) 원년에 좌우에게 이르기를 “무릇 정치는 반드시 전적(典籍)을 널리 보아야 하거늘, 우리 동방이 해외에 있어서 중국의 책이 드물게 오고 판각(板刻)은 또 쉽게 깎여져 없어질 뿐 아니라 천하의 책을 다 새기기 어려우므로 내가 구리를 부어 글자를 만들어 임의로 서적을 찍어내고자 하니 그것을 널리 퍼뜨리면 진실로 무궁한 이익이 될 것이니라” 하시고, 드디어 고주(古註)《시경(詩經)》《서경(書經)》《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글자를 써서 이를 주조하시니 이것이 주자소를 만들게 된 연유이며 이를 정해자(丁亥字)라 했다. 또 세종께서 주조한 글자가 크고 바르지 못하므로 경자년에 다시 주조하니 그 모양이 작고 바르게 됐다. 이로 말미암아 인쇄하지 않은 책이 없으니 이것을 경자자(庚子字)라 이름했다.’

《세종실록》에는 1434년에 주조한 갑인자의 우수성을 언급하는 내용과 함께 활자 주조의 구체적인 방법이 기록돼 있어 주목된다.

‘태종께서 처음으로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시고 큰 글자를 주조(鑄造)할 때에, 조정 신하들이 모두 이룩하기 어렵다고 했으나, 억지로 우겨서 만들게 하여, 모든 책을 인쇄해 중외에 널리 폈으니 또한 거룩하지 아니하냐. 다만 초창기이므로 제조가 정밀하지 못해 매양 인쇄할 때를 당하면 반드시 먼저 밀(蠟)을 판 밑에 펴고 그 위에 글자를 차례로 맞추어 꽂는다. 그러나 밀의 성질이 본디 유(柔)하므로 식자한 것이 굳지 못해 겨우 두어 장만 박으면 글자가 옮겨 쏠리고 많이 비뚤어져서 곧 고르게 바로잡아야 하므로 인쇄하는 자가 괴롭게 여겼다. 내가 이 폐단을 생각해 일찍이 경에게 고쳐 만들기를 명하였더니 경도 어렵게 여겼으나 내가 강요하자 경이 지혜를 써서 판을 만들고 주자(鑄字)를 부어 만들어서 모두 바르고 고르며 견고하여 비록 밀을 쓰지 아니하고 많이 박아 내어도 글자가 비뚤어지지 아니하니 내가 심히 아름답게 여긴다.’

세조 역시 대군 시절부터 왕명을 받들어 출판 사업에 종사했으며 즉위한 이후에는 을해자(乙亥字), 을유자(乙酉字) 등을 주조해 쓰게 했다. 성종대에도 신묘자(辛卯字)와 계축자(癸丑字)를 주조하는 등 활자에 대한 개선 작업은 조선 전기 내내 꾸준했다.

성현은 태종대에서 성종대까지의 활자 변천사를 기록한 다음에 글자를 주조하는 법, 업무 분담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대개 글자를 주조하는 법은 먼저 황양목(黃楊木)을 써서 글자를 새기고 해포(海蒲)의 부드러운 진흙을 평평하게 인판(印版)에다 폈다가 목각자(木刻字)를 진흙 속에 찍으면 찍힌 곳이 패여 글자가 되니 이때에 두 인판을 합하고 녹은 구리를 한 구멍으로 쏟아부어 흐르는 구리액이 패인 곳에 들어가서 하나하나 글자가 되면 이를 깎고 또 깎아서 정제한다. 나무에 새기는 사람을 각자(刻字)라 하고 주조하는 사람을 주장(鑄匠)이라 하고 드디어 여러 글자를 나누어서 궤에 저장하는데 그 글자를 지키는 사람을 수장(守藏)이라 하여 나이 어린 공노(公奴)가 이 일을 했다.’

위에서 《용재총화》의 글을 인용, 조선 전기 활자 변천사와 활자 주조, 업무 분담 등에 대해 살펴보았지만 역대 왕들이 활자 개발에 상당한 공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현과 같은 당대의 지식인들 역시 활자 발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의 인쇄소에 해당하는 교서관(校書館)에 초기부터 140명의 인쇄공이 배치될 만큼 출판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가 있었다. 조선시대 높은 수준의 교육과 다수의 출판 서적 간행 밑바탕에는 ‘활자 주조’라는 국가적 의지와 실천이 있었던 것이다.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병주 < 건국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