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 '知的 전통'에 언어학 접목…'소쉬르 구조주의' 빛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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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명문가의 위대한 유산
소설가 한말숙은 《아름다운 영가》를 쓰면서 이렇게 서문을 적고 있다. 수많은 유산을 남긴 명문가들을 살펴볼 때면 그의 말처럼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번에 살펴볼 소쉬르가 그렇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언어는 랑그와 파롤이며 기표(記標)와 기의(記意) 결합의 산물’이라는 구조언어학을 주창했다. 랑그가 공유하는 언어체계라면 파롤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언어행위들이다. 요즘 ‘애정남’으로 인기 있는 개그맨 최효종은 ‘했습니다잉’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게 파롤에 해당한다.
소쉬르는 구조언어학으로 인해 오늘날 철학사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구조주의의 선구자로 간주된다. 지난주 살펴본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철학의 대가라면 소쉬르는 언어학의 대가로 쌍벽을 이룬다. 더욱이 비트겐슈타인이 부르주아의 후예였다면 소쉬르는 대대로 학자를 배출한 스위스를 대표하는 명문 귀족의 후예다.
소쉬르 가문은 프랑스에서 정치적 박해를 피해 17세기에 스위스로 이주했는데 대대로 박물학과 물리학, 지질학 등 자연과학 분야에서 학자를 배출했다. 증조부인 호라체 베네딕트 소쉬르는 자연과학자이자 등산가로 알피니즘 창시자다. 1760년 그는 몽블랑 최초 등정자에게 상금을 걸었다. 아무도 등정하지 못하자 1787년 자신이 직접 몽블랑에 올랐다.
조부 니콜라 데오도르는 주네브대의 지리학과 교수를 지냈다. 부친 앙리는 생물학자이자 탐험가로 미국과 멕시코를 탐험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주네브의 명가인 푸르탈레스 백작 가문 출신이다.
그런데 페르디낭 드 소쉬르에 이르러 가문의 전통인 자연과학 분야가 아닌 언어학 분야에서 큰 성취를 일궜다. 소쉬르는 늘 선조들이 남겨준 수많은 책과 수집품들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자랐다.
소쉬르가 구조언어학을 정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문의 지적 전통, 즉 자연과학적 사유가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소쉬르 연구가인 A 메이예의 말을 빌리면 소쉬르는 최고 지적 문화의 가정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특히 아버지의 직접적인 교육을 통해 과학적인 정신 구조를 이어받았다. 이는 그의 지적 개성과 업적의 가장 전형적인 특성을 이루는 요인이 됐다고 메이예는 분석한다.
여기에 소쉬르 가문과 교분이 있는 A 픽테와의 만남이 결정적이었다. 소쉬르는 열두 살 때 ‘언어학적 고생물학’ 창안자인 픽테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언어학을 접했다. 이어 소쉬르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주네브대에 진학해 화학과 물리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그는 19세 때 자신의 재능이 언어학에 있다며 전공을 바꾸었다. 말하자면 소쉬르는 그의 선조에게 이어받은 과학적인 정신 구조에다 관심 분야인 언어학을 접목해 자신만의 학문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은 하마터면 빛을 보지 못할 뻔했다. 그는 주네브대에서 언어학을 강의하며 이론을 정립했는데 강의가 끝나면 자신의 강의 노트를 잘게 찢어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소쉬르는 생전에 한 권의 저서도 남기지 않았다. 구조주의의 탄생을 알린 그의 ‘일반언어학 강의’는 제자들이 스승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의 노트를 토대로 재구성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최효찬 < 연세대 연구원 · 자녀경영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