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규문式 마케팅에 푹빠진 獨 Miele(밀레)
독일 가전업체 밀레 한국법인인 밀레코리아의 안규문 대표(60·사진)는 최근 본사와 임기 연장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임기 연장 기간은 이 회사 해외 법인 지사장들에게 적용되는 2년이 아닌 5년이었다. 쌍용 출신인 그는 밀레코리아가 설립된 2005년부터 대표를 맡아왔으며, 최소한 2016년까지 임기를 보장받게 된 셈이다. 독일인이 아닌 사람으로 10년 이상 법인 대표 자리를 유지하는 건 창사 112년째인 밀레에서도 이례적인 일이다.

안 대표는 “세계 1,2위인 삼성과 LG가 버티고 있는 한국은 밀레에서도 최고경영자(CEO)의 무덤으로 통하는 지역”이라며 “이런 곳에서 기대 이상으로 잘하고 있는 점이 높게 평가를 받았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밀레코리아 매출은 2005년 수십억원대에 불과했으나,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20% 이상 늘어 올해는 240억원을 훌쩍 넘길 것으로 전망된다. 본사 제품 판매만 담당하는 밀레코리아 직원 73명이 한 사람당 연간 3억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한 것이다. 애프터서비스(AS)·배송 담당 직원 24명을 제외한 일반 직원들만 치면 200만원이 넘는 밀레 세탁기나 식기세척기를 1인당 연간 250대 이상씩 팔았다는 얘기다.

일부 백화점에서나 볼 수 있는 밀레 제품이 한국에서 인기를 끌게 된 배경은 뭘까. 안 대표는 “2005년부터 프리미엄 아파트 빌트인 시장만을 노린 게 주효했다”고 설명했다. 가장 먼저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나 역삼동 아이파크 등 고급 아파트에 세탁기와 식기세척기, 냉장고 등을 빌트인으로 납품했다.

소량 주문 생산 위주인 밀레 본사 입장에서는 한 번에 수백 대씩 판매하는 한국법인이 화제가 됐다. 전체 매출로 중간 정도하는 나라가 직원 1인당 매출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해서다. 밀레 본사에서는 한국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2005년부터 연례 글로벌 법인 대표 회의 때 안 대표를 강연자로 초청했다.

본사에서 안 대표의 유명세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2007년 국내 건설경기가 꺾일 조짐을 보이자 기업(B2B) 시장만으론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 경기 변동에 덜 영향을 받는 소비자(B2C) 시장을 넓히기 위해 온라인 마케팅에 승부를 걸었다. 일부 연예인들과 스포츠 스타들이 밀레 가전을 쓴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오픈 마켓에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해 본사에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본사에서 펄쩍 뛰었다. “고가 명품 가전을 지금까지 인터넷에서 팔아본 전례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한국 법인의 온라인 매출이 매년 2배 이상 늘자 밀레 본사도 “한국의 인터넷 판매 방법을 배워야 한다”며 기존 방침을 180도 선회했다.

올해 열린 두바이 회의에서 안 대표 강연을 들은 마르쿠스 밀레 등 밀레 회장단은 안 대표에게 독일어로 최고를 뜻하는 “오버자이테(oberseite)”를 외쳤다.

이것뿐만 아니었다. 전 세계 글로벌 법인의 매출 보고서도 안 대표가 만든 한국식으로 바꿨다. 총 매출 하나로 표기하던 것에서 빌트인 같은 프로젝트 분야와 온라인 부문, 일반 매출 등 세 가지로 구분토록 했다. 밀레코리아가 밀레의 마케팅뿐만 아니라 회계 기준에서 모델 케이스가 된 셈이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