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가 '공정위 서류'에 진땀
백화점에 비상이 걸렸다. 전년 동기대비 매출 증가율이 뚝 떨어졌다. 이럴 땐 백화점과 협력업체들이 머리를 맞대고 매출을 끌어올릴 판매 촉진 아이디어 짜기에 열을 올려야 하는 게 정석이다.

이런 급박한 시기에 백화점들이 난데없이 서류챙기기 교육에 골몰하고 있다. 한 백화점의 공정거래 담당자는 “임원과 점장을 대상으로 한 교육은 끝냈고 이달 중에는 과장·부장 등 간부들을 대상으로 협력업체에 관한 모든 업무협의 사항을 서류화하는 교육을 실시할 계획”이라고 5일 말했다. 그는 협력업체와 판촉행사 등을 협의해야 하는 영업 담당자와 상품 소싱·매장 개편을 담당하는 상품 담당자가 모두 교육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모든 업무를 서류화하기 위한 시스템을 새로 갖추는 전산화 작업도 검토 중이라고 덧붙였다.

‘대규모 유통업에서의 거래공정화에 관한 법률(대규모 유통업법)’이 지난 10월 말 국회를 통과한 이후 백화점 업계에선 문서를 강조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대기업 사무실에서 종이가 사라지고 있는 시대 흐름과는 동떨어진 장면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대규모 유통업법이 내년 1월부터 시행되면 불공정 거래 행위에 대한 입증 책임을 유통업체가 져야 하는 탓이다. 과거 공정거래위원회의 ‘대규모 소매점업 고시’에서는 불공정 거래 행위를 적발하고 입증하는 것은 공정위의 몫이었다. 백화점 실무자 입장에서는 매출을 올리는 것보다 서류를 갖추는 게 더 중요한 일이 됐다. 자칫 협력업체와 시비가 붙어 이를 입증하지 못하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는 까닭이다. ‘소매점업 고시’가 통용될 때는 과징금을 물면 그만이었지만 앞으로는 징역형이나 벌금을 각오해야 하는 처지다.

협력업체들은 이 법을 환영하는 걸까. 지난달 25일부터 송년세일에 들어간 협력사들도 피곤한 기색이다. 날씨나 소비자 동향에 맞춰 순발력 있게 행사상품을 준비해야 하지만 서류 작업이 만만치 않은 탓이다. 유통업체가 자체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서류는 한계가 있어 협력업체가 제공해줘야 하는 게 태반이다.

결국 대규모 유통업법의 가장 큰 수혜자는 공정위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대형 유통업체의 불공정거래를 입증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단번에 털어냈기 때문이다. ‘이미지 추락, 경기 하락, 업무 서류화’의 3중고로 유통업계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강창동 유통전문기자 cd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