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만든 무설탕·무칼로리 건강 주스 한 잔 하시겠습니까?”

서울 문래동 사무실에서 만난 장석민 UPS코리아 사장(51)은 분주하게 마실 것부터 챙겼다. 사장실 안에는 소형 냉장고와 간단한 식기, 복사기까지 구비돼 있었다.

그는 직원들에게 커피나 복사 심부름을 시키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각자가 맡은 책임만 다를 뿐 함께 일하는 식구들이니까요.”

장 사장은 직원들 사이에 권위의식이 없는 최고경영자(CEO)로 인기가 높다. 27년간 UPS에 근무하며 서구식 기업 문화가 자연스레 몸에 뱄다. 여기다 중학교 때 미국 이민 후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만큼 고생하면서 소탈한 성격을 갖게 됐다.

장 사장은 1994년 34세의 나이에 UPS와 대한통운이 합작설립한 UPS대한통운의 사장으로 선임돼 주변을 놀라게 했다. 애초 배송업무로 시작해 세계 최대 물류업체의 최연소 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고생할 때 체득한 근면성실함이 밑바탕이 됐다고 했다.

◆옥수수 따며 배운 근면성실

평범한 중학생이었던 장 사장은 14살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 인디애나 폴리스로 이민 갔다. 출국하던 날 반나절 수업을 반납하고 김포공항으로 배웅나온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그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타지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이민 직후 두 달간 고모댁에 머물던 그는 “미국에서는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스스로 벌어 장만해야 한다”는 말에 다음날 곧바로 일거리를 찾았다. 하지만 법적으로 정규 아르바이트 자리는 얻을 수 없는 나이였다.

수소문 끝에 옥수수 따는 일을 얻을 수 있었다. 50달러짜리 10단 자전거 마련을 목표로 일을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에 불과한 어린 나이에 뙤약볕 아래서 옥수수를 땄던 경험은 지금도 가장 눈물겨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을 하면서 옥수수 잎사귀에 얼굴이 다 긁혔다. 새벽 이슬에 옷이 젖었다 마르기를 반복하면서 온몸엔 땀띠가 생겼다. 시차 적응도 안 돼 졸음이 밀려오기 일쑤였다. ‘도대체 왜 내가 미국왔나’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그렇게 3주를 고생해 390달러를 벌었다. 새 자전거 6대를 살 수 있는 큰 돈이었다. 처음으로 노동의 힘겨움과 소중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그는 창고세일하는 이웃집에서 중고 자전거를 샀다. 힘겹게 옥수수를 따며 번 돈으로 차마 새 자전거를 살 수는 없었다고 했다.

이후 고등학교와 대학 재학 시절에도 그의 고된 아르바이트는 이어졌다. 부유하지 않은 살림 탓에 전업주부였던 어머니까지 틈틈이 바느질에 청소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모님께 손을 벌려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합법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16살 전까지는 주말 가을에는 낙엽을 쓸고 여름에는 잔디를 깎았다. 16살 이후에는 접시를 닦거나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다. 차가 없어서 4시간을 일하기 위해 1시간 거리를 걸어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대학을 혼자 힘으로 다녔다. 주말 저녁에 또래들이 모여서 노는 모습을 보며 부럽기도 했지만, 그때의 경험들은 그가 UPS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밑바탕이 됐다.

◆배송업무에서 최연소 사장까지

“앞, 뒤, 옆 친구들의 얼굴을 자세히 봐둬라. 졸업할 때는 이 가운데 분명히 3명이 없을 것이다.” 퍼듀대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한 장 사장은 대학 4년 내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교수가 한 말을 되새기며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어렵게 졸업은 했는데 직장이 문제였다. 그가 졸업한 1983년은 미국 경기가 굉장히 나빴던 시기로 직원 채용을 위해 학교를 찾는 기업들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처음부터 UPS에 지원했다고 했다. 한 차례 떨어졌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뉴저지에 있는 유대계 회사에서 산업공학 엔지니어로 2년가량 일하다 UPS 입사에 재도전했다.

‘산업공학 엔지니어 구함. 단 수동 운전면허 필수.’ 조건이 희한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합격한 후에야 이유를 알게 됐다. 산업공학 엔지니어로 채용은 하겠지만 먼저 배달 일을 하며 능력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UPS 배달 차량이 모두 수동기어여서 수동 면허가 필요했다.

계약기간은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기약이 없었다. 배송업무를 하다가 은퇴하는 사람도 많다는 얘기도 들렸다. “4년제 대학을 버젓이 나와서 트럭 운전일은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거절하려다 오기가 생겼다.

배송업무의 시급은 8달러. 주당 40시간을 일하면 전 직장의 절반 수준인 월 1200~1500달러를 벌 수 있었다.

그나마 일감이 없으면 기름값도 건지기 힘들었다. 어떤 날은 아침에 출근했는데 일이 없으니 그냥 돌아가라고도 했다.

배달 일은 고됐다. 해도해도 물건이 줄지 않아 운전하며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는 날이 다반사였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 12번도 더 들었지만 이번에도 오기로 버텼다.

특유의 근면성실로 8시간이 걸릴 일처리를 7시간에 해내면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단 4개월 만에 회사로부터 합격점을 받았다. UPS 내에서도 이례적인 기록이다.

“4개월간 길 위에서 죽도록 일하면서 고객 응대법과 포장의 중요성 등 27년 근무기간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직장생활 동안 가장 값진 경험이었죠.” 입사 9년 만인 1994년, 그는 34세에 한국지사 총괄을 맡으며 UPS 내 최연소 사장이 됐다.

◆사진찍는 CEO

장 사장은 1994년에 이어 2006년부터 다시 한국법인 대표를 맡고 있다. 그가 대표를 맡은 2006년 UPS코리아는 고객, 직원, 재정, 경영프로세스 등을 평가하는 ‘BSC 평가’에서 전 세계 200여개 법인과 지사 가운데 1등을 했다. UPS가 처음으로 항공 소화물 부문과 화물 부문을 통합한 2009년에도 다시 한번 1등을 차지했다.
장 사장은 “회사에 근무하는 27년 동안 매일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의 방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액자도 매사진선(每事盡善·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라) 글귀다. 좌우명이자 직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장 사장의 경영철학 중 하나는 직원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도록 사무실 문을 열어두고 일이 있으면 자신이 직접 직원을 찾아간다. 아침마다 사무실을 한 바퀴씩 돌며 직원들 안부를 묻는 것도 그에게는 일상이다.

3년 전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그의 경영철학은 더 확고해졌다. “제가 사진을 잘 찍는 게 아니라 풍경이 좋아 사진이 잘 나온겁니다. 아무리 훌륭한 직원도 환경이 안 좋으면 자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시들어버리 듯, 환경을 좋게 만들어주는 게 CEO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장 사장은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이미 준전문가 수준의 실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내 봉사활동 중에 몰래 찍은 사진을 일일이 직원들에게 이메일로 보내기도 하고 사진을 모아 신년 달력을 만들 계획도 세워놨다.

이유정 기자 y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