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잡기보다 경기 부양'…유럽發 돈경색 본격 차단
유럽중앙은행(ECB)이 사상 최저 수준으로 기준금리를 낮춘 것은 우려했던 경기침체가 가시권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핵심지역으로 재정위기가 번지고 내년 유로존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마이너스로 돌아설 것이라는 경고가 이어지자 돈을 풀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지난달 기준금리를 ‘깜짝 인하’ 한 지 한 달 만에 추가 인하에 나선 것은 ECB가 얼마나 다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 유럽연합(EU) 정상들이 재정위기 해결을 위해 추진 중인 재정통합이 언제 성사될지 알 수 없다는 점도 ECB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재정통합 등 근본적 처방이 실행될때까지 ECB가 유럽경제를 지킬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과감한 대책’ 내놓은 ECB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8일 열린 ECB 통화정책회의의 핵심 의제는 유동성 확대였다. 11월 유로존 물가상승률은 3.0%로 ECB의 목표치(2.0%)를 웃돌았지만 인플레이션은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경기가 급속히 침체되는 상황에서 뒷짐만 지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유로존 경제가 완만한 침체로 접어들 가능성이 있다”며 “경기둔화는 유럽 국가들에 부채 상환능력을 떨어뜨릴 뿐”이라고 금리인하 배경을 설명했다. ECB는 기준금리를 인하한 데 이어 지급준비율도 내년 1월 18일부터 2%에서 1%로 낮추기로 했다.

유럽 정상들이 재정위기를 해결할 확실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도 ECB가 나설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ECB마저 행동에 나서지 않을 경우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사태가 악화될 것이란 얘기다.

이날 통화정책회의에선 유럽 전역이 경기침체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한 ‘과감한 대책’들도 나왔다. 유럽 은행들이 ECB에 돈을 빌리면서 맡기는 담보의 조건을 완화하기로 한 것. 현재 담보의 10%까지로 제한한 무보증 은행채의 담보 인정비율을 더 높이고 자산담보부증권(ABS)도 담보로 인정하기로 했다. 또 최장 1년 남짓인 대출기간을 3년으로 연장하기로 했다.

◆재정통합 논의 시작한 EU 정상

유럽연합(EU) 27개국 정상들은 8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회담을 갖고 재정통합을 위한 논의에 들어갔다. 9일까지 이어지는 이 회담에서 독일과 프랑스는 “재정적자가 GDP 대비 3%를 넘는 회원국들을 제재할 수 있도록 EU 조약을 개정하자”고 주장했다. 두 나라는 공동법인세와 금융거래세 도입도 요구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이날 헤르만 반롬푀이 EU정상회의 상임의장에게 서한을 보내 “경제통화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EU 회원국 간의 새로운 계약이 지체 없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날 반롬푀이 의장이 “EU 조약 개정은 모든 회원국의 동의를 이끌어내기 어렵기 때문에 부속 조약을 바꾸는 선에서 마무리하자”고 절충안을 제시하자 양국 정상이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재정적자가 3%를 넘으면 EU로부터 자동적으로 제재를 받는 조항에 대해 일부 국가들은 ‘주권 침해’라며 거부감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실적으로 독일 등 소수 국가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EU 회원국들이 GDP 3% 이하 재정적자 기준을 충족시키기 어려운 처지라는 점도 걸림돌이다.

한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EU의 장기 신용등급을 강등할 수 있다”며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바꿨다.

김동욱/이태훈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