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의 선율] 만물을 어루만지는 달빛…어둠은 더 이상 두렵지 않다
[그림 속의 선율] 만물을 어루만지는 달빛…어둠은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전통적으로 서양에서 밤은 악령들이 활개 치는 악의 영역이었다. 특히 강이나 호수는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슬라브족의 전설에 따르면 물은 ‘루살카’라는 정령이 서식하는 곳이었다. 인어 같은 존재인 이 물의 요정은 낮에는 물속에서 지내다가 늦은 밤 물 밖으로 나와 풀밭 위에서 춤을 추는데 멋진 남성을 보면 노래와 춤으로 유혹해서 최면을 건 후 물속으로 데려가 죽음에 빠뜨린다고 한다.

루살카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는데 대개는 연인에게 버림을 받거나, 혼전 임신으로 고통 받다가 자살한 여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운명의 신이 부여한 시간보다 오래도록 살아남아 세상을 떠도는데 특히 자신이 목숨을 끊었던 물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루살카가 하나같이 악령인 것은 아니었다. 품었던 원한이 풀리면 루살카는 미련을 훌훌 털고 자신의 서식지를 떠난다고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네 민간의 전설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여름이면 텔레비전 납량특집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이 이야기의 상당수는 한을 품고 죽은 젊은 여인들에 관한 것이다. 이 한을 품은 여인들은 사무치는 원한을 잊지 못해 이승을 배회하지만 한을 풀게 되면 곧 이승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편안히 저승으로 발걸음을 옮긴다는 점에서 루살카 이야기와 흡사하다. 이런 유사성은 슬라브족이 아시아에서 이주해 동유럽에 정착한 민족이라는 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말 인간의 내면과 무의식의 영역, 초자연적인 상상의 세계에 대한 자유로운 탐색을 선언한 낭만주의자들에게 있어 밤은 더 이상 인간을 해치는 악령들로 가득 찬 영역이 아니었다. 특히 괴테는 어두컴컴한 밤을 빛의 부재 상태가 아닌 그 자체로서 본질적인 힘을 가진 영역으로 파악했는데 이는 만물에 신성이 깃들었다고 본 스피노자나 모제스 멘델스존의 생각을 심화시킨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초기 낭만주의자들의 공감을 얻어 예술과 철학 및 과학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려는 움직임으로 발전한다.

화가들이라고 새로운 흐름을 수수방관할 리는 없었다. 괴테의 사상에 공명했던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는 여러 점의 밤 풍경화를 제작했고 심지어 그는 정신성이 한창 고조된다는 땅거미가 질 무렵이 돼서야 붓을 들었을 정도였다. 이런 움직임은 카를 구스타프 카루스 등 프리드리히를 따르던 낭만파 풍경화가들 사이에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게 된다.

카를 바그너(1796~1867) 역시 자연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선배 화가들의 입장에 공감, 밤 풍경화를 그렸던 화가 중의 한 사람이다. 시인의 아들로 태어나 드레스덴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바그너는 동시대 낭만주의 화가들이 그랬듯이 오랫동안 이탈리아와 스위스, 오스트리아의 산악지대를 편력하며 자연에 깃든 신성을 몸소 체험하려 했다.

그의 진지한 노력은 헛되지 않아 1819년에는 존경해 마지않던 풍경화의 거장 프리드리히, 요한 크리스티안 달과 함께 드레스덴 아카데미 전시회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1820년 제작한 ‘달밤에’는 생생한 자연 체험에서 우러나온 경험을 토대로 그린 밤 풍경화의 걸작 중 하나다.

그림을 살펴보면, 먼저 화면의 앞부분에는 커다란 바위와 가파른 절벽이 좌우에 자리하고 있고 그 사이로 야트막한 폭포가 서너 개의 층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다. 그 뒤로 고요히 흐르는 개울 양편에는 훤칠한 키의 나무들이 하늘 위로 팔을 뻗치고 있다. 왼쪽 상단의 나무들 사이로 드러난 하늘에는 엷은 구름이 나직이 깔려 있고 그 사이로 보름달이 고요한 밤의 세상을 차분히 내려다보고 있다. 그의 시선을 받은 바위와 나뭇잎들은 반짝반짝 은빛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유난히 시선을 끄는 것은 달을 향해 솟아오른 교회의 첨탑이다. 그것은 마치 신은 밤에도 달빛을 매개로 자신의 따사로운 손길을 거두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낭만주의자들이 마음에 품었던 이상적인 밤의 세계다. 어둠의 영역은 더 이상 악령으로 가득 찬 두려운 곳이 아니라 아름다운 요정들이 뛰노는 목가적인 판타지의 세계라는 믿음이 만들어낸 세계다. 밤은 이렇게 낭만주의자들에 의해서 새롭게 선(善)의 영토로 편입됐다. 카를 바그너의 그림 속에서 더 이상 한을 품은 루살카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달님이 그의 소원을 들어준 때문일까.

◆ 명화와 함께 듣는 명곡 - 드보르자크 오페라 '루살카' 중 '달에게 부치는 노래'

[그림 속의 선율] 만물을 어루만지는 달빛…어둠은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슬라브 전설 속의 루살카는 멋진 남성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악령이지만 체코슬로바키아의 낭만파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자크(1841~1904)의 오페라 ‘루살카’의 주인공은 죽은 자를 살려주는 ‘착한 악령’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호수 정령의 딸인 루살카는 아버지에게 한 왕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고 그와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인간에게 버림받을 경우 악령이 된다는 마법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루살카는 결국 인간이 되지만 왕자의 배신으로 아버지에게 이끌려 다시 호수로 돌아온다. 마법사가 루살카에게 구원받으려면 왕자를 죽여야 한다고 하자 그는 이를 거부하고 남자를 유혹해 죽음에 빠뜨리는 악령이 된다. 얼마 후 다시 호수를 찾은 왕자는 루살카를 발견하고는 격렬하게 사랑을 나눈 후 죽어간다. 루살카는 왕자를 살려달라고 신에게 간청하고 자신은 다시금 차갑고 어두운 물속으로 돌아간다.

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드보르자크가 야로슬라프 크바필의 리브레토(오페라 대본)를 바탕으로 1900년 완성했는데 이듬해 3월 프라하에서 초연돼 유례없는 성공을 거뒀다. 루살카가 달님에게 인간이 돼 왕자와 사랑을 이루게 해달라고 간절히 비는 ‘달에게 부치는 노래’는 오페라 아리아의 백미 중 하나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 미술사학박사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