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팍한 호주머니 사정
외식 시장은 갈수록 위축…직장인 대다수 '벤또 점심'…올해 시장규모만 145조원
최대 생산업체 도카쓰
하루에 30만개 만들어…손 소독 안하면 출입 금지…위생 철저
“어라, 왜 문이 안 열리지?” 화장실에 갇혔다. 짧은 시간 동안 여러 가지 동작을 취해 보았지만 허사. 볼일을 마친 직원 한 명이 씩 웃으며 다가오더니 문 옆에 달린 알코올 분사기에 손을 갖다 댄다. 소독을 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시스템이란 걸 몰랐다.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 요코하마시에 있는 도시락업체 도카쓰의 생산공장. 일본에서 가장 큰 도시락 제조시설이다. 위생관리가 엄격한 이 공장이 하루에 만들어내는 도시락은 30만개. 종류만 140여개에 달한다. 이 회사 소리타 신이치 생산관리부장은 “최근 들어 주문량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며 “365일 24시간 풀가동해도 물량 대기가 벅차다”고 말했다.
일본은 도시락 천국이다. 시장 규모만 우리나라 돈으로 100조원이 넘는다. 한국 전체 외식시장 규모보다 크다. 최근엔 증가세도 가팔라졌다. 일본인들의 유서 깊은 ‘벤또 사랑’에 장기 불황이 겹친 결과라는 분석이다.
◆갈수록 커지는 벤또시장
일본 도쿄 이다바시(飯田橋)역 인근. 점심시간이 가까워오자 편의점에 샐러리맨들이 모여든다. 하나둘 마음에 드는 도시락을 고른 뒤 계산을 치른다. 말단으로 보이는 젊은 샐러리맨은 손에 대여섯개의 도시락을 들고 총총걸음이다. 길가 음식점들도 모두 가게 앞에 자신들만의 도시락을 내놓고 손님을 맞는다. 일본 취업정보회사인 디스코의 다쓰모토 도모시(辰本友志) 관리본부장은 “부서직원 가운데 절반가량은 항상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한다”고 말했다. 상사를 중심으로 우르르 몰려나가 식사를 하는 한국의 점심 풍경과는 다른 모습이다.
일본에서는 편의점이나 슈퍼마켓에서 도시락과 반찬 등을 사다가 사무실이나 집에서 먹는 것을 ‘나카쇼쿠(中食)’라고 한다. 일반 음식점에서 사먹는 ‘외식(外食)’과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먹는 ‘내식(內食)’의 중간 형태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본에서 외식이 줄고 나카쇼쿠가 늘기 시작한 것은 불황의 골이 깊어진 1990년대 후반부터다. 일본 식품안전·안심재단과 야노(矢野)경제연구소에 따르면 1995년 5조엔이던 나카쇼쿠 시장 규모는 2005년에는 6조3000억엔으로 25.9% 늘었다. 같은 기간 외식시장 규모는 12.9% 쪼그라들었다. 나카쇼쿠 시장의 증가세는 최근 들어 더욱 뚜렷해졌다. 2008년엔 8조5000억엔으로 3년 만에 38%가량 커졌고 최근엔 10조엔(145조원)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약 60조원으로 추정되는 국내 외식시장보다 두 배 이상 큰 규모다.
◆뿌리 깊은 도시락 사랑
일본인들은 속어로 ‘집행유예’를 ‘벤또모치(도시락을 얻음)’ 또는 ‘벤또오모랏타(도시락을 받았다)’라고 한다. 감옥에 당장 끌려가지 않고 풀려난 것이 도시락을 받은 것처럼 기쁘다는 의미다.
일본인들이 이처럼 도시락을 특별히 애호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한국일어일문학회가 발간한 ‘스모남편과 벤또부인’이라는 책에서는 일본의 더운 기후를 가장 큰 이유로 꼽는다. 날씨가 후텁지근한 탓에 일본인들은 다른 나라에 비해 찬 음식을 먹는 문화가 발달했다. 뜨끈한 국물이 필요한 한국과 중국 등에 비해 도시락을 싸기에 편한 식습관인 셈이다.
음식을 각자 자기 그릇에 따로따로 담아서 먹는 음식문화도 벤또 발달 요인이다. 일본인들은 함께 먹는 음식이 있을 경우에도 개인용 접시에 반드시 덜어 먹고 이를 위한 젓가락도 따로 준비한다. 별도의 젓가락이 없을 경우엔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기 젓가락을 거꾸로 잡아 사용할 정도로 일반적인 식사 습관 자체가 도시락 문화와 가깝다.
엄격한 예의범절을 요구하는 일본인들의 숨막히는 직장생활이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찾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박종현 일본 호세이(法政)대 경제학부 교수는 “일본의 회사 분위기는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딱딱한 편”이라며 “점심시간만이라도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긴장을 풀고 싶어하는 샐러리맨들이 도시락 시장의 주 소비층”이라고 설명했다.
◆벤또, 일본의 불안을 담다
최근엔 여기에 한 가지 이유가 더 추가됐다. 경제적인 사정이다. ‘잃어버린 20년’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면서 일본 직장인들의 생활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매년 임금 인상안을 놓고 노사가 격돌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올해는 얼마나 깎을까가 일반적인 이슈다. 해마다 물가가 내려가는 ‘만성 디플레이션’이 빚은 기현상이다.
대외개방을 미루고 농업에 대해 지나친 보호정책을 편 탓에 음식가격도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싼 편이다. 일본이 수입쌀에 대해 매기는 관세는 800%에 달한다. 이로 인해 전체 소비지출에서 식료품이 차지하는 비중을 나타내는 ‘엥겔계수’도 경제수준에 비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일본의 엥겔계수는 23% 수준으로 7% 안팎인 독일과 미국에 비해 3배 이상 높다. 계산 방식이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한국의 엥겔계수도 15% 수준으로 일본보다 낮다.
노후생활에 대한 걱정도 크다. 사회적 안전망 구실을 했던 일본 기업들의 ‘종신고용’은 이제 옛말이 됐고 연금수령액도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다. 게다가 나라의 재정적자 규모가 큰 탓에 앞으로 세금은 계속 오를 일만 남았다. 인터넷 검색광고기업 이엠넷의 야마모토 신이치로(山本臣一郞) 전무는 “일본 직장인들의 도시락에는 일본인들이 느끼는 불안감이 모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