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상 속에서 세상을 마음속에 담고 살아간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양학에서는 대개 세상 속에 산다는 점을 중시하면 유교 사상에 가깝고, 세상을 마음속에 담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면 불교 사상에 가깝다. 그렇지만 유교 사상이라고 해서 마음을 중시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이렇게 썼다.

‘맹자가 “만물이 모두 내 안에 갖춰져 있다”고 했으니 이는 인(仁)의 본체가 지극히 큼을 비유한 말이다. 무릇 천지간에 사해(四海)와 팔황(八荒), 금수(禽獸)와 초목(草木) 등이 다 물(物)인데 인자(仁者)는 이 모두를 똑같이 봐 자신에 속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나의 백성이고 모든 이민족들이 다 나의 이민족이며 모든 금수와 초목들도 다 나의 금수와 초목인 것이다. 나(我)란 물(物)에 상대되는 개념이니 비록 피차의 구별을 있을지라도 내가 저 만물을 모두 포괄할 수 있고 만물 각각에 맞게 처리할 방도가 있으니 따라서 만물이 모두 나의 마음속에 갖춰져 있어 조금도 부족한 바가 없는 것이다.

내가 만물을 접할 때 처리하는 방도가 극진하지 못하면 내 자신에 돌이켜 볼 때 필시 무언가 미흡하여 허전하게 느껴질 테지만 나 자신에 돌이켜 보아 부족한 바가 없다면 그 즐거움이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서(恕)를 힘써 실행하면 인(仁)을 구함이 이보다 더 가까울 수 없다”했으니 이 인을 구해서 인을 얻는 것이 이른바 “자신에 돌이켜 진실하면 즐겁다”는 것이다. 《예기(禮記)》에 “성인(聖人)은 사해(四海)로 한 집을 삼고 중국으로 한 몸을 삼는다”고 했는데 이는 그래도 조금 부족한 점이 있다. 《맹자(孟子)》는 여기서 개념을 미루어 넓혀서 만물을 자신에 소속시키는 데 이르렀으니 더할 나위 없다 하겠다.’

성호(星湖)는 위 맹자의 말을 인(仁)의 개념을 가지고 해석했다. 즉 인자(仁者)는 천지 만물을 모두 똑같이 봐서 자신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므로 세상 사람은 모두 나의 사람이고 나아가서 짐승 초목들까지도 모두 나의 짐승, 나의 초목으로서 모두 내 안에 포괄된다.

따라서 남은 그저 남일 뿐이 아니라 나의 남이며 사물은 그저 사물일 뿐 아니라 나의 사물이니 사물을 접응할 때 자신이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하면 마음이 흡족하지 못하고 자신을 돌이켜 보아 흡족하면 마음이 즐겁다. 남이 그저 남일 뿐이라 느껴지고 사물이 내 밖의 사물일 뿐이라 느껴진다면 이는 나의 마음이 진실하지 못한 것이요 인(仁)하지 못한 것이다. 이럴 때 나의 마음은 내 안의 사물을 분리해 타자(他者)로 인식한다. 나와 사물이 분리되면 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이 갈등은 서(恕)를 통해 해소된다. 주자(朱子)는 서의 개념을 ‘추기급인(推己及人)’이라 했다. 쉽게 말하면 자기의 입장을 미루어서 남을 헤아려 주는 것이다.

유교의 인(仁)과 서(恕)는 천지 만물을 나에게 속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데 그치고 천지 만물과 완전히 합일한 것은 아니다. 성호가 피차의 구별이 있다고 하고 나의 사람, 나의 짐승, 나의 초목이라 했듯이 남이 아니라고 느낄 뿐 나와 만물 사이에 관계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나와 만물의 간격을 단숨에 허물어 몽땅 공무화(空無化)해 버린다. 나와 남이란 개념을 아예 없애 버리는 것이다.

유교는 자기와 세상과의 관계 정립을 중시해 삼강오륜(三綱五倫)과 같은 윤리를 중시하는 반면 불교는 세상과 자기와의 갈등을 근원에서 해소하여 완전한 해탈을 추구한다. 그래서 말은 서로 비슷하지만 그 취지는 다른 것이다.

불교 사상은 어디까지나 유심론(唯心論)에 입각한다고 할 수 있다. 유심론에 의하면 우주 만물은 저마다의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빚어내는 형상이고 내 본성의 거울에 비쳐 있는 그림자일 뿐이다. 우주 만물뿐 아니라 우주 만물을 상대하는 나도 필경 나의 내면 의식에 비쳐진 빈 형상일 뿐이니 나는 내 안에 또 하나의 나를 만들어서 만물을 상대하고 내 내면의 거울은 나와 만물 모두를 아울러 비추고 있는 것이다.

자, 만물을 내 안에 담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내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내 안에는 만물뿐 아니라 만물을 상대하는 또 하나의 나도 있다. 이 또 하나의 나가 바로 우리가 늘 ‘나’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 나이니 이 나를 의식하면 곧바로 세상과 간격이 생겨 만물은 남이 된다. 만물을 남으로 인식하면 내 마음은 인(仁)하지 못하게 되고 사람과 사물을 접할 때 진실하지 못하게 된다. 자기라 주장하는 이 나가 없으면 우리의 마음은 텅 비고 고요하다. 이 마음자리는 그저 대상을 비출 뿐 분별이 없으므로 우주 만물을 다 포괄해 비좁지 않으니 피아(彼我)를 분별하는 생각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만물을 다 담아도 늘 고요하고 즐겁다.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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