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룬 것도 없는데 지금 관두면 코미디…내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이룬 것도 없는데 지금 관두면 코미디…내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가수 양희은 씨는 매일 청년들의 고민과 마주한다. 12년째 MBC 라디오 ‘여성시대’를 진행하고 있는 그는 하루에도 수십통씩 청년들의 사연이 담긴 편지를 받는다. 그는 “최근 들어 얼마나 답답하고 말할 곳이 없었는지 젊은 청취자들의 편지가 많이 온다”며 “그야말로 막다른 길에 몰린 친구들”이라고 말했다.

양씨는 청년시절 거친 세파에 당당히 맞섰다. 우리는 ‘아침이슬’을 빼놓고는 그를 설명할 길이 없다. 또렷하고 당당한 목소리는 1970년대 청년들의 욕구와 정서를 순수하게 담아냈다는 평이다. 그는 당시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변되는 청년문화의 한복판에 있었다.

힘겨웠던 시절 그의 노래는 매번 우리를 보듬었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당시 정부는 국민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TV 공익광고를 만들었고 그 배경 음악으로 양씨의 ‘상록수’를 선택했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애초 작곡가 김민기 씨가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만들었지만 1970~80년대에는 대표적인 운동권 가요로, 2002년에는 정부의 3·1절 기념식장에서 축가로 불려졌다.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젊은층의 사연이 얼마나 오나요.

“끊이지 않고 와요. 그만큼 답답한 거죠. 그래도 열심히 산 만큼 보상을 받은 친구들의 편지도 옵니다. 23세 여성이 얼마 전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면서 꿈을 찾고 있다는 사연을 보내왔어요. 이 청년에게서는 두 번째로 온 편지입니다. 이전에는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생계를 꾸리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어요. 이렇게 상황이 안 좋으면 잠시 꿈을 접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적 독립이 우선돼야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거든요. ”

▶취업난이 심해 많은 청년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력서만 쓰면서 취업이 안 된다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아르바이트 등 밑바닥 경험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저는 어떻게든 돈을 벌기 위해 ‘다리에 큰 흉터가 있느냐’는 말을 들으면서도 청바지를 입고 노래를 불렀어요. 사지육신 멀쩡한데 아무것도 안 하고 부모에게 손을 벌리는 것은 창피한 일입니다.”

▶학창시절 힘든 경험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간경화로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1960년대 대부분 가난하게 살았던 시절에 아버지가 없는 집안의 형편이라는 것이 어땠을 것 같은가요. 단단한 울타리가 순식간에 없어진 것 같았죠. 어머니가 하던 의류사업도 형편이 안 좋아졌고 빚 보증을 잘못 서면서 쫄딱 망했죠. 그래도 창피하지는 않았죠. 기질적으로 굴하지 않는 성격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돈을 벌었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소녀가장이 된 저는 대학 재수생 시절부터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명동의 한 맥주집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돈이 급해 일 첫날부터 가불을 요청했죠. 맥주집의 DJ를 맡았던 이종환 선생님이 ‘성도 이름도 모르는 아이가 노래 몇 개 하고 월급을 미리 달라고 하느냐’며 맹랑하다고 그러셨어요. 옆에 있던 창식이 형(가수 송창식)이 제 편을 들어줘 겨우 돈을 받았습니다. 그때가 열아홉 살이었는데 대학 등록금이 7000원이던 시절에 월 4만원을 벌었어요. 나중에는 인기를 얻어 월급이 100만원까지 올랐죠.”

▶그 정도면 꽤 많은 돈을 모았겠군요.

“당시에 정말 어머어마한 돈을 벌었어요. 하지만 월급이 나오면 빚쟁이가 이자까지 쳐서 곶감 빼먹듯이 돈을 가져갔기 때문에 처음엔 제대로 모을 수가 없었죠. 전 현금을 만져본 적도 없어요. 그때 준수엄마라고 명동의 유명 ‘일수쟁이’가 채권자였는데 나중에 제 콘서트를 보러 왔어요.”(웃음)

▶뮤지컬 ‘어디만큼 왔니’가 인생사를 담았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공연에 제 인생을 풀어놨지만 1960~70년대를 추억만 하는 공연은 아닙니다. 제 어린 시절 고민도 근본적으로 지금 10~20대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젊은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을 거예요. 모든 사람의 성장통에는 공통 분모가 있고 지극히 개인적인 것도 사회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굴곡 속에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처음부터 제 인생에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확신이 있다면 젊음이 아니죠. 중학교 3학년 때 졸업 앨범에 쓴 꿈은 ‘마음의 평화’였어요. 바람에 휘몰아쳐 떨어지는 낙엽처럼 되지 않기를 바랐죠. 마냥 주저하는 청년들을 보면 안타까워요. 청춘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기성세대가 청년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너무 많이 주문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가난한 청년들은 어디서 삶의 에너지를 찾아야 하는 겁니까.

“사실 그런 사람들에게 할 이야기가 많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동기 부여를 하고 에너지를 만드는 일이 쉽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자기를 끌고 갈 수 있는 동기를 찾아야 합니다. 누가 이렇게 저렇게 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절박한 욕구를 발굴해야죠. 뭐가 되고 싶은지, 과거에 무엇으로 칭찬을 받았는지 등을 생각해야 합니다.”

▶새로운 음반 계획은 있습니까.

“내년에 데뷔 40주년 기념 음반이 나옵니다. 살도 쑥쑥 빠지고 바빠질 겁니다. 다른 사람처럼 기념 앨범이라고 과거 노래를 긁어 모으지는 않습니다. 전 언제나 새로운 곡을 냅니다. 가수는 노래가 주업이죠. 역설적으로 노래를 그만 부르고 싶어서 노래를 합니다. 제대로 이룬 것도 없는데 지금 그만둔다면 완전히 코미디죠.”

■ 청년문화 '아이콘'양희은

'노래 알바' 소녀가장 20살에 '아침이슬'로 데뷔

올해로 데뷔 40돌을 맞은 양희은 씨는 국내 대표적인 대중음악 가수다. 1970년대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표되는 청년문화의 아이콘이었다. 서울 재동초등학교 경기여중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서강대 사학과를 나왔다. 대학 1학년 때인 1971년 데뷔했다. 데뷔곡은 ‘아침이슬’이다. ‘백구’ ‘들길 따라서’ ‘한계령’ 등 수많은 명곡으로 한국 대중음악사를 수놓았다.

하지만 스스로 ‘아침이슬’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는 음악적 한계를 절감, 1987년 결혼 후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다가 1991년 미국에서 유명 영화음악 감독이자 기타리스트인 이병우와 녹음한 앨범 ‘양희은 1991’로 돌아왔다. 이 음반은 ‘11월 그 저녁에’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등의 곡들이 담긴 명반이다. 지금까지 24장의 앨범을 냈다.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