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청 고위 간부와 오비맥주 경영진이 지난 10일 서울 시내 한 중식당에서 ‘점심 모임’을 가졌다. 이날 오전 국세청의 요청에 의해 갑작스럽게 이뤄진 만남이었다. 이 자리에서 국세청 간부는 11일로 예정된 오비맥주 주요 제품의 출고가 인상을 미뤄줄 것을 요청했다. 연말연시 각종 물가불안 요인과 서민들의 어려운 삶을 감안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국세청 실무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비맥주가 당초 발표대로 가격인상을 강행할 움직임을 보이자 고위 간부가 직접 나선 것이다. 오비맥주 관계자는 “강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주류사업 면허권를 가진 당국의 고위층에서 요청하는 것이어서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전했다.

◆오비맥주,사흘 만에 인상 철회

오비맥주는 11일 카스 OB골든라거 카프리 등 맥주 제품 가격인상을 당분간 보류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지난 8일 주요 제품 출고가를 7.48% 올리겠다고 발표한 지 사흘 만이다. 회사 관계자는 “연말 소비자물가 안정을 위한 정부 시책에 부응하기 위해 가격인상 계획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며 “내년 초 상황을 지켜보며 인상을 다시 추진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고위층 회동’ 이전까지 오비맥주는 가격인상 방침에 강경한 입장이었다. 업계 관행인 국세청과의 ‘충분한 사전 교감’ 없이 인상계획을 전격 발표했을 때만 해도 오비맥주는 외부 압력에 굴하지 않겠다는 분위기였다. 발표 당일 도매상들에 11일부터 출고가를 올린다는 공문을 보내고, 경기도 광주와 이천 등 관할 세무서에 제품별 가격인상 내역을 신고하는 등 인상계획을 기정사실화했다. 유가 급등과 맥아 알루미늄 등 원재료 상승으로 제조원가가 10~20% 올라 올해 초부터 가격인상을 추진했고, 국세청과도 다양한 인상안을 놓고 충분히 협의했다는 설명이었다.

‘사후 통보’를 받은 국세청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올리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을 때도 “법대로 하겠다”는 방침이었다. 하지만 맥주값 인상을 계기로 위스키 소주 등의 연쇄적인 인상을 우려하는 국세청 간부의 설득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경쟁사인 하이트맥주가 “맥주값 인상 요인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인상계획이 없다”며 정부와 동조하는 모양새를 취한 것도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올 들어 ‘가격인상 철회’ 잇따라

제품 가격 인상계획이 정부의 ‘압력’으로 무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롯데칠성음료는 지난달 18일 칠성사이다 펩시콜라 레쓰비 등 주요 제품 출고가를 인상했다가 열흘 만에 다시 내렸다. 인하 결정은 이재혁 롯데칠성 대표가 지식경제부 고위층의 호출을 받고 과천정부청사를 다녀온 후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 측은 가격 환원 배경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물가 관리에 주력하고 있는 정부 시책에 적극 호응하기 위해 음료업계 선두주자로서 고통을 분담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지난 5월 초에도 E1이 액화석유가스(LPG) 가격을 ㎏당 69원 올린다는 자료를 낸 지 4시간 반 만에 철회했고, SK가스도 공급가를 75원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서울우유는 지난 2월 커피전문점 베이커리 등에 공급하는 우유 납품가격을 올리겠다는 방침을 언론에 밝혔다가 4시간 만에 철회하기도 했다.

정부가 이처럼 고위층까지 동원해 서민생활 안정을 앞세운 ‘생활필수품 물가 잡기’에 나서면서 업계에선 관련 제품 가격인상은 당분간 물건너간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내년 총선까지는 정치적인 논리로 가격인상이 쉽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