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권 움직이는 지분 잡아라"…정상영의 절묘한 '백기사 투자'
삼성그룹 지주회사인 에버랜드의 2대 주주가 된 KCC의 절묘한 ‘백기사 투자전략’이 주목받고 있다.

현대자동차 만도 등의 주식을 사들여 범현대가 계열사의 경영권 안정을 위한 백기사 역할을 톡톡히 한 데다 차후에 거액의 매각 차익을 거두는 수완까지 발휘해왔기 때문이다. 이번 딜에서도 에버랜드 주식 인수로 순환출자 고리를 끊어야 하는 삼성그룹의 고민을 일거에 해소해주면서 삼성그룹과의 사업 협력 확대와 미래 이익 실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페인트 건자재 등이 주력 사업인 KCC가 ‘큰손’의 위력을 과시하기 시작한 것은 2003년 6월. KCC는 당시 3000억원가량을 들여 현대차 223만주, 현대중공업 574만주, 현대모비스 93만주, 현대산업개발 356만주를 잇달아 사들였다.

당시 공식적인 인수 이유는 단순 투자 목적이었다. 하지만 다목적 포석을 겨냥한 정상영 KCC 명예회장(사진)의 결단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범현대 일가가 2세 경영체제로 넘어간 상황에서 과거처럼 혈연 관계에 의존한 사업 협력이 유지되기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지분 투자 방식으로 유대 관계를 강화하려 했다는 분석이다.

범현대 일가에서 정 명예회장의 역할론을 계산에 뒀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고 정주영 창업회장의 막내동생인 정 명예회장이 집안 어른으로서 계열사들의 경영권 안정을 돕는 백기사 역할을 자임했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때 와해된 현대가 일원이던 만도그룹 재건에 정 명예회장이 발벗고 나선 것도 이런 이유라는 분석이다. KCC는 만도건설과 컨소시엄을 구성, 네덜란드계 투자회사 선세이지로부터 만도 지분 81.9%를 인수했다. KCC는 2670억원을 투자해 만도 지분 29.99%(약 223만주)를 확보했다. 이후 무상증자를 거치면서 KCC 보유 주식은 484만주로 늘었다.

이 같은 투자전략은 KCC의 탄탄한 성장세로 이어졌다. KCC는 범현대가의 보호막 덕분에 2003년 1조7245억원이던 매출이 지난해 4조3037억원(연결 기준)으로 껑충 뛰었다. 게다가 현대차와 만도 주식 처분으로 7171억원의 투자 차익까지 챙겼다. 이 돈은 에버랜드 주식 매입 자금으로 쓰였다.

삼성카드가 KCC에 매각한 에버랜드 지분은 42만5000주(지분율 17%)다. KCC에 2대 주주 자리를 내줬지만 삼성그룹의 경영권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수준이다. 삼성 측은 에버랜드 지분 67.64%를 보유 중이다. 게다가 KCC의 백기사 투자 이력으로 볼 때 에버랜드 경영권에 분란을 일으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삼성 측의 판단이다.

이번 빅딜은 에버랜드 지분 매각주관사를 맡은 골드만삭스와 JP모간이 다리를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골드만삭스는 소모성자재구매대행(MRO)업체인 아이마켓코리아 매각 등 삼성의 굵직한 딜을 도맡아왔고 JP모간은 KCC가 만도 지분을 처분할 때 주관사를 맡은 인연이 있다.

마침 금융산업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에 따라 삼성카드는 내년 4월까지 에버랜드 지분율을 5% 미만으로 낮춰야 하는 상황이었고 풍부한 현금을 보유한 KCC는 마땅한 투자처를 찾던 중이었다.

삼성 계열사와 거래 관계가 전무했던 KCC는 사업 기회를 확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 현대차 주식을 처분해 자금을 마련하는 등 에버랜드 지분 인수에 적극 나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영태 기자 py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