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현대화 주역, '철강왕' 박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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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13일 향년 8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폐질환을 앓았던 그는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다가 상태가 악화돼 이날 오후 5시 25분께 세상을 떠났다.
박 명예회장은 철강 불모지인 우리나라에 사상 첫 일관제철소인 포항제철(현 포스코)을 건설해 중화학공업 입국의 기틀을 다져 '철강왕'으로 불려왔다.
미국의 '철강왕'으로 칭송받는 카네기는 당대 35년 동안 연산 조강 1000만 t을 이뤘지만, 박 명예회장은 25년(1968~1992년) 만에 연산 조강 2100만 t을 달성했다. 포스코 관계자는 "기술력과 자본력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카네기보다 짧은 기간에 2배가 넘는 규모로 키워냈다"고 설명했다.
현재 포스코는 연산 3700만 t 규모의 조강생산 능력으로 세계 4위권의 철강회사로 성장했다. 최근 철강 경기 하락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철강업체들을 제치고 시가총액과 신용등급에서 모두 수위를 기록하고 있다.
포스코가 현재와 같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1960~70년대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와 국민 성원에 힘입은 것이다. 하지만 박태준이라는 걸출한 리더십이 보태진 결과라고 업계에선 평가하고 있다.
1978년 중국의 최고 실력자 등소평은 일본의 기미츠제철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신일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 고 했다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느냐"는 대답을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박 명예회장은 1927년 동래군 장안면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성장해 1945년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해방으로 학업을 중단한 후 귀국해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6기로 졸업했다. 이때 교수로 재직중이던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인연을 쌓았고 훗날 이땅에 최초의 일관제철소 건설의 큰 꿈을 갖게 된다.
1963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후 경제인으로 변신, 1964년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돼 1년 만에 대한중석을 흑자 기업으로 바꿨다. 박 명예회장의 탁월한 경영능력을 높게 평가한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종합제철소의 건설의 특명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박 명예회장은 제철소 건설 과정에서 고비고비마다 난관을 특유의 결단력과 열정으로 극복하면서 세계가 부러워하는 철강신화를 일궈냈다. 제철소 건설과정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박 명예회장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1967년 어렵사리 일관제철소 건설 지원을 위해 조직된 국제차관단이 IBRD의 부정적인 전망으로 와해되자 일본의 유력인사들을 일일이 설득해 대일청구권자금을 전용하도록 함으로써 피지 못할 수도 있었던 일관제철소 건설의 꿈을 현실화시켰다.
박 명예회장은 또 공기업 체제에 따르는 비효율과 부실의 여지를 막기 위해 조직의 자율과 책임문화 정립에 중점을 뒀다.
1977년 3기 설비가 공기지연으로 고전하고 있을 때에도 발전 송풍 설비 구조물 공사에서 부실이 발견되자 80% 정도 진행된 상태였지만 부실공사를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며 모두 폭파한 일은 완벽주의의 의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목욕론도 박 명예회장의 일면을 이해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다. 그는 "깨끗한 몸을 유지하는 사람은 정리, 정돈, 청소의 습성이 생겨 안전 및 예방 의식이 높아지고 최고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며 청결한 주변 관리를 주문했다. 때문에 제철소 건설 초기부터 현장에 샤워시설을 완비했다.
또한 1983년 광양제철소 호안공사 시공 때에는 감사팀 직원들에게 스쿠버 장비를 갖추어 전문가 도움을 받아 바닷속에서13.6Km 호안의 돌을 일일이 확인해 불량 시공을 점검하기도 했다.
이와함께 철저한 비리 근절도 박 명예회장이 지향했던 경영철학이다. 그는 정치권의 압력 배제와 함께 설비 공급업자 선정의 재량권 인수 등을 골자로 하는 내용을 메모에 적어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소위 '종이 마패' 로 불리운 이 메모는 외부압력을 차단하고 비리를 근절하는 상징처럼 전해져 온다.
박 명예회장은 또 일찍부터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해 1986년 포항공대(포스텍)를, 1987년 포항산업과학연구원 (RIST)을 설립, 포스코-포항공대-포항산업과학연구원 등 3개의 축으로 하는 산학연 개발체제를 구축했다. 이는 국내 최초의 산학연 연구개발 체제로 산업계 전반에 걸쳐 새로운 기술개발 모델을 제시했다.
박 명예회장은 2000년 40년간 거주하던 서울 아현동 소재 주택을 처분해 사회에 환원하기도 했다. 이 집은 1961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으로 있을 당시 의장이던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특별 하사금'를 받아 매입한 집이었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1남4녀가 있다.
한경닷컴 산업경제팀 o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