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나이 찾는다지만…나이 줄여 퇴직 연장하거나 나이 늘려 연금 조기 수령
매년 600명 이상 법원 문 두드려…'정년 연장' 신청허가율 절반 이하
4대 그룹 퇴직기준일 '호적'…대법도 '정정 호적 기준' 판결
A씨는 호적정정을 근거로 조만간 인사팀에 정년퇴직 연장을 요청할 예정이다. 요청이 받아들여지면 만 57세인 A씨는 1년 더 근무할 수 있게 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법원에 호적정정(가족관계기록부상 생년월일 정정)을 신청하는 베이비부머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신분 세탁의 우려 때문에 가족관계기록부에 기재된 출생년월일을 바꾸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자녀 등록금 부담 등 노후의 경제적 짐을 덜 수 있어 전국 가정법원에는 호적정정 신청이 러시를 이루고 있다. 신청비용은 건당 약 50만원이다.
◆호적 정정신청 러시
서울가정법원에 “가족관계기록부상 출생일을 정정해달라”며 연령정정을 신청하는 건수는 꾸준히 증가해왔다. 2006년과 2007년 연간 400여건에 불과했던 신청건수는 금융위기로 경제한파를 맞았던 2008년 한 해 동안 1194건으로 두 배 이상 급증했다. 2008년 이후 다소 줄긴 했지만 매년 600명 이상이 출생연도(나이)를 변경해달라고 법원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공식 통계 부족으로 연령별 호적정정 건수를 정확히 분류할 수는 없지만 각 지방가정법원을 취재한 결과 퇴직을 앞둔 베이비부머들의 나이 조정이 대부분인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가정법원의 한 판사는 “가족관계기록부상 생년월일을 정정해달라고 신청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 대부분이 50대 이상”이라며 “신청할 때 누구도 드러내놓고 ‘정년이나 연금 때문’이라고 밝히진 않지만 정년이 임박했거나 연금받을 날짜가 1~2년 남은 신청자라면 ‘그것 때문’으로 유추한다”고 설명했다.
부산가정법원 관계자도 “지난해에도 815건의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신청이 들어왔고 이 중 절반 정도가 연령정정 요청이었다”며 “한 해에 서너 번씩 신청서를 반복해 내는 50대도 수십명 된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가족관계기록부상 생년월일을 바꾸는 게 쉽지는 않다. ‘신분 세탁’의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법원에서는 신청인에게 출생일 정정을 해야만 하는 확실한 이유와 증거를 요구한다. 서울가정법원의 경우 2006년에는 146건, 2007년에는 227건, 2008년에는 718건이 받아들여졌다. 지난해에는 493건이 허가됐다. 그러나 정년연장을 위한 호적정정 요구가 받아들여진 것은 통상 절반을 넘지 않았다.
법률사무소 개명천사의 박종진 사무장은 “정년이나 국민연금을 고려한 출생일 변경 문의가 많이 들어오는 것은 사실”이라며 “실제 나이에 학교를 다녔다는 학교 생활기록부나 졸업증명서 혹은 주변 친구들의 증언이 주요 증거로 채택되기 때문에 이를 확보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황병진 변호사는 “자료가 없으면 족보를 살펴 본인 항렬과 실제 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증거자료로 제출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현택수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런 사례들은 한국사회에서 50대 인구가 재취업이 얼마나 힘든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며 “노령화가 급격하게 이뤄지고 있는 한국사회도 노령인구의 사회적 참여에 대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퇴직연장, 연금 조기수령 신청
생년월일을 바꾸는 데 성공한 이들은 즉각 본인이 속한 회사에 정년 연장을 신청한다. 2006년 이후 호적정정 후 연장신청을 한 공무원이나 공기업 직원의 경우 퇴직연장 신청이 받아들여지는 추세다. 정년퇴직일을 1년3개월 앞두고 호적을 바꾼 뒤 정년 연장을 요구했다가 거부당한 정모씨(62)가 낸 2009년 소송에서 대법원이 “지방 공무원의 경우 실제 출생일인 연령정정 후 출생일을 기준으로 정년을 산정하라”고 내린 판결 덕택이다. 퇴직연장 요구를 거부한 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대부분 원고(소송자)가 이긴다.
1982년 한국전력공사에 입사해 현재 한국남동발전에서 근무하고 있는 B씨(56)도 지난 4월 2012년 3월로 예정돼 있던 퇴직일을 1년이나 늦췄다. 2009년 말 가족관계기록부 정정 신청을 통해 1954년생으로 기록돼 있던 출생연월일을 1955년생으로 바꾸고 회사에 정년퇴직일 변경신청을 한 것이다. 회사 측은 “28년간 회사를 다니며 이의를 제기하지 않다가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연장을 요구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정년 기일 변경을 거부했지만 B씨는 창원지법에 소송을 냈고 지난 4월 승소했다.
나이를 줄여서 정년을 늦추는 이들도 많지만, 반대로 나이를 높여서 국민연금을 빨리 받으려는 이들도 더러 있다. 지난 10월 1952년생이던 가족관계기록부상 나이를 1950년생으로 바꾼 C씨(60)는 “회사 진급이 늦었던 것 빼고는 살면서 크게 불편한 점이 없었는데, 주변 친구들이 60세가 돼 국민연금을 받는데 나만 연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억울해 호적 변경을 신청했다”고 말했다.
◆공기업은 퇴직연장 가능
공무원이나 공기업에선 대법원 판결에 따라 호적을 고친 뒤 퇴직연장이 가능하지만 사기업의 경우 사정이 다르다. 본인이 속한 회사 내규에 따라 정년 연장에 실패하기도 한다. 한국전력에서 청원경찰로 일하던 D씨(60)는 생년월일을 정정하고, 회사 측에 정년퇴직 예정일을 변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하자 소송을 냈다. 하지만 법원은 “‘한국전력공사 인사관리규정에 따르면 ‘법원의 판결로 생년월일이 정정되더라도 인사기록부상의 생년월일과 정년퇴직 예정일은 변경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다”며 안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나이를 고치고도 정년연장은 못한 경우다.
삼성, LG, 현대자동차, SK 등 4대 그룹은 모두 입사 후 가족관계기록부상 생년월일이 변경됐다면 바뀐 날짜를 기준으로 정년일을 산정한다는 게 인사 방침이다. 현대자동차 관계자는 “아직까지 그런 사례가 없지만 법원의 판단으로 출생일이 정당하게 바뀌었다면 변경된 날짜를 기준으로 정년을 산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생년월일 정정·개명 전문 법률사무소인 평로의 김영진 사무장은 “대법원 판례도 있는 만큼 회사 내규와 배치되지 않는다면 변경될 날짜로 정년을 산정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라며 “다만 회사에서도 인사계획이 있기 때문에 여의치 않을 경우 당사자와 협의를 통해 일정 부분 보상해주고 퇴직시키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심성미 기자 smsh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