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모셨던 故 박태준 명예회장님 "할 일 많아 100살까지 살거다" 하시더니…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조용경 < 포스코엔지니어링 부회장 >
출장을 떠나 미국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내렸다. 휴대폰을 켜자마자 한꺼번에 쏟아진 30통 가까운 문자메시지.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님의 타계 소식을 접하는 순간 가슴 저미는 아픔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나는 할 일이 많아서 100살까지는 살 거다”라고 늘 말씀하셨는데, 그리고 칸트 이상으로 정확하고 정밀하게 건강관리를 해 오셨는데, 이렇게 가시다니….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내 나이 서른이던 1981년 3월11일이었다. 제11대 국회 재무위원장으로 내정돼 법과 재정 분야를 아는 보좌관을 뽑고자 면접을 하는 자리였다. 몇 마디 질문 끝에 “듣던 대로 똑똑하구만. 날 좀 도와주겠나”라며 손을 내미셨는데 그렇게 부드럽고 따뜻할 수가 없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지금 물어보라”는 말씀에 당돌하게도 “정말로 직원들의 조인트를 까십니까”라고 여쭈었는데, 그분은 파안대소하며 “까다로운 질문이구만…, 일해 보면 알게 될 거다”라고 대답하셨다.
3개월쯤 지나서였던가. 처음으로 일본 출장을 수행하게 됐는데, 명함 챙기는 것을 깜빡 했었다. 하늘이 노래지는 상황이었는데, 그분은 도쿄사무소에 긴급히 간이명함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자네는 내가 명함도 필요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인 줄 아는 모양인데, 그래도 명함은 필요한 거다”라고 하셨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아마도 그게 처음 만난 날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을까…. 그때의 느낌이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눈비를 함께 맞으며 견딜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을 게다.
그분은 내가 공부를 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도록 만드셨다. 아니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주셨다. 생소한 분야의 국정을 수행하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에 대해서는 책을 통해 공부를 하도록 했다. 편한 시간에 함께 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모르는 것을 반드시 해결하고야 마는 성품이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 나올 때까지 끝없는 질문을 통해 정답을 유도하는 스타일이었다. 더러는 그 분야의 전문가나 담당 공무원을 불러서 배우는 자리를 갖기도 했다.
그러면서 꼭 덧붙이는 한마디는 “공부 좀 해라. 좋은 머리 뒀다가 어디다 쓰려고 그래”였다. 사실은 그분 자신이 평생토록 책을 손에서 놓는 일이 별로 없었다.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그냥 ‘불도저’ 식으로만 일을 하는 분이 아니었다. 포스텍이 만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날, 정치권의 고위 인사가 포스텍 교수 지망자라며 보내 온 이력서를 주며 “김호길 총장에게 주고 검토해 보라고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다. 며칠 후 “안 되겠다”는 김 총장의 답변이 돌아오자 빙긋이 웃으며 “내가 총장은 제대로 뽑았지”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포스텍도 포스코처럼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1993년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고, 그분은 망명객 아닌 망명객이 되어 긴 시간 해외를 떠돌아야 했다. 2년 후 모친상을 당하자 구금될 각오를 하고 귀국했다. 상을 치른 다음 기소중지자의 신분으로 대검찰청에 출두해야 했다.
건강이 극도로 쇠해 있던 터라 구급차에서 내릴 때 부축을 해드렸는데, 그분께서는 “나 혼자 서겠다”며 수십명의 카메라맨들을 향해 마주 섰다.
그때의 그 형형한 눈빛…. 그건 6·25전쟁 당시 최전선에서 침략군을 응시하던 눈빛이었고, 포스코 건설 초기 부실공사 현장을 폭파해 버리던 눈빛이었으며,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던 외환위기 당시 환란 극복을 위해 불철주야할 때의 그 눈빛이었으리라.
박 회장님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포스코를 걱정하며 떠나셨다. 그분의 손으로 길러낸 후배들이 잘 감당해 나갈 것이다. 어려운 이 나라의 경제, 역시 그분의 기업가정신을 배운 후배 기업인들이 든든하게 지켜낼 것이다. 삼가 고인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
조용경 < 포스코엔지니어링 부회장 >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내 나이 서른이던 1981년 3월11일이었다. 제11대 국회 재무위원장으로 내정돼 법과 재정 분야를 아는 보좌관을 뽑고자 면접을 하는 자리였다. 몇 마디 질문 끝에 “듣던 대로 똑똑하구만. 날 좀 도와주겠나”라며 손을 내미셨는데 그렇게 부드럽고 따뜻할 수가 없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지금 물어보라”는 말씀에 당돌하게도 “정말로 직원들의 조인트를 까십니까”라고 여쭈었는데, 그분은 파안대소하며 “까다로운 질문이구만…, 일해 보면 알게 될 거다”라고 대답하셨다.
3개월쯤 지나서였던가. 처음으로 일본 출장을 수행하게 됐는데, 명함 챙기는 것을 깜빡 했었다. 하늘이 노래지는 상황이었는데, 그분은 도쿄사무소에 긴급히 간이명함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자네는 내가 명함도 필요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인 줄 아는 모양인데, 그래도 명함은 필요한 거다”라고 하셨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아마도 그게 처음 만난 날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을까…. 그때의 느낌이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눈비를 함께 맞으며 견딜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을 게다.
그분은 내가 공부를 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도록 만드셨다. 아니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주셨다. 생소한 분야의 국정을 수행하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에 대해서는 책을 통해 공부를 하도록 했다. 편한 시간에 함께 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모르는 것을 반드시 해결하고야 마는 성품이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 나올 때까지 끝없는 질문을 통해 정답을 유도하는 스타일이었다. 더러는 그 분야의 전문가나 담당 공무원을 불러서 배우는 자리를 갖기도 했다.
그러면서 꼭 덧붙이는 한마디는 “공부 좀 해라. 좋은 머리 뒀다가 어디다 쓰려고 그래”였다. 사실은 그분 자신이 평생토록 책을 손에서 놓는 일이 별로 없었다.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그냥 ‘불도저’ 식으로만 일을 하는 분이 아니었다. 포스텍이 만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날, 정치권의 고위 인사가 포스텍 교수 지망자라며 보내 온 이력서를 주며 “김호길 총장에게 주고 검토해 보라고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다. 며칠 후 “안 되겠다”는 김 총장의 답변이 돌아오자 빙긋이 웃으며 “내가 총장은 제대로 뽑았지”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포스텍도 포스코처럼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1993년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고, 그분은 망명객 아닌 망명객이 되어 긴 시간 해외를 떠돌아야 했다. 2년 후 모친상을 당하자 구금될 각오를 하고 귀국했다. 상을 치른 다음 기소중지자의 신분으로 대검찰청에 출두해야 했다.
건강이 극도로 쇠해 있던 터라 구급차에서 내릴 때 부축을 해드렸는데, 그분께서는 “나 혼자 서겠다”며 수십명의 카메라맨들을 향해 마주 섰다.
그때의 그 형형한 눈빛…. 그건 6·25전쟁 당시 최전선에서 침략군을 응시하던 눈빛이었고, 포스코 건설 초기 부실공사 현장을 폭파해 버리던 눈빛이었으며,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던 외환위기 당시 환란 극복을 위해 불철주야할 때의 그 눈빛이었으리라.
박 회장님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포스코를 걱정하며 떠나셨다. 그분의 손으로 길러낸 후배들이 잘 감당해 나갈 것이다. 어려운 이 나라의 경제, 역시 그분의 기업가정신을 배운 후배 기업인들이 든든하게 지켜낼 것이다. 삼가 고인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
조용경 < 포스코엔지니어링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