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우한 어린시절
계모 김성애 손에서 성장…64년 노동당 지도부 입성
가족 다툼 끝 정권 장악
이복동생 김평일 제치고 74년 후계자로 지명…93년 권력승계 마무리
先軍 정치로 통제 강화
美·中 경제 지원 노리면서 핵실험 등 군사도발 강행…2008년 뇌졸중 후 건강악화
◆불우했던 최고 통치자의 아들
김 위원장은 1941년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벌이던 러시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김일성의 70회 생일인 1982년부터 김 위원장의 출생연도를 1942년으로, 출생지를 백두산 밀영이라고 선전하는 등 우상화 작업을 벌여왔다.
7세에 어머니 김정숙을 여의고 계모 김성애의 손에서 성장했으나 ‘모성 결핍’에 따른 반감과 계모 및 이복형제와의 권력 투쟁은 그를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로 만들었다. 김 위원장은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한 이듬해인 1964년 노동당 조직지도부에서 ‘지도자’로 첫 걸음을 내디뎠다.
◆가족 간 다툼 끝에 정권 장악
김 위원장은 당시 권력 2인자인 삼촌 김영주 당 조직지도부장, 정치적 힘을 과시하던 계모 김성애, 김일성의 남다른 사랑을 받던 이복동생 김평일 등을 물리치며 권력을 잡았다. 그는 1973년 후계자 자리인 당 중앙위 선동부장이자 조직부장에 올랐고 같은 해 11월 국가보위부를 창설해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삼기 시작했다. 1980년 6차 노동당 대회에서 노동당 비서이자 당 중앙위 정치국 상무위원, 당 군사위원 등 요직을 한꺼번에 얻어내 ‘2인자’ 자리를 굳히며 후계자로 공식 지목됐다.
군인이 아님에도 1991년 12월 최고사령관, 1992년 공화국 원수에 추대된 데 이어 1993년 김일성으로부터 국방위원장직을 공식 승계해 권력 승계 절차를 사실상 마무리했다.
◆선군정치 통큰정치로 관심
1994년 7월8일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본격적인 김정일 시대가 열렸지만 북한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할 정도로 수백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북한 사회는 붕괴 직전에 몰렸다. 김 위원장은 김일성에 대한 3년상을 빌미로 ‘유훈통치’를 내세워 얼굴 없는 지배를 이어갔고, ‘물리적 강제력’을 보유한 군대에 의존하는 선군(先軍)정치로 북한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김일성 3주기를 마친 1997년 9월 추대 형식으로 당 총비서에 올랐으며 이듬해 9월 제10기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최고 권력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국방위원회 수장으로 재추대되면서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났다.그는 이후 ‘강성대국론’ ‘신사고론’ ‘실리주의’ 등을 내세워 경제 발전을 꾀했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 화해협력을 추진하기도 했다. ‘통큰 정치’를 내세우며 화끈한 성격을 보이기도 했던 그는 미국 일본뿐 아니라 중국 러시아와도 폭넓게 교류하며 경제적 지원을 노렸다. 동시에 핵실험, 장거리 미사일 개발 등 군사적 도발을 감행하며 체제 유지를 위해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그는 셋째 아들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하고 2009년 11월에는 화폐개혁도 단행했으나 북한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가운데도 러시아 극동지역을 방문해 남북과 러시아 등 3국을 관통하는 가스관 연결 사업에 합의하는 등 새로운 국면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질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사망, 오랜 철권통치의 막을 내렸다.
정태웅 기자 redae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