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티토 유고 대통령 장례식에 각국 정상급 58명을 포함해 120여개국 사절단이 참석했다. 유고의 관영 통신이 ‘인류의 정상회담’이란 제목을 붙였을 정도다. 가장 관심을 끈 인물은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다. 팽창주의 외교정책을 폈던 브레즈네프는 비동맹 독자노선을 걷던 티토를 걸림돌로 여겼으나 장례식엔 직접 참석했다. 유고를 다시 위성국으로 끌어들이려는 장기 포석이 깔려 있었던 거다. 반면 먼데일 부통령을 단장으로 파견했던 카터 미 대통령은 외교 감각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았다.

2005년 4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에는 200여개국이 대표단을 보내 조문외교를 벌였으나 실속은 대만이 챙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바티칸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손을 잡으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상황에서 천수이볜 총통이 교황청과 유대관계를 다지는 계기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천 총통에게 비자를 발급해준 이탈리아 당국에 항의하며 조문단을 파견하지 않았다.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워싱턴을 찾은 건 1963년 3월이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은 드골을 백악관에서 만나 1시간 남짓 월남전에 대한 밀담을 나눴다. 얼마 후 키신저가 비밀리에 파리를 방문해 의견을 조율한 다음 파리평화협정 체결로 이어졌다는 게 닉슨의 회고다. 아무튼 파리평화협정으로 월남전은 종결됐다.

외국 조문단을 받지 않겠다던 북한이 돌연 남한 조문단을 모두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대남 선전용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밝혔다. 정부가 김대중 전 대통령 유족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측에만 제한적으로 조문을 승인한다는 방침인 만큼 남·남 갈등을 부추기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그렇지 않아도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한국기독교회협의회,민화협 등이 조문단 방북을 신청할 예정이란다.

우리는 1994년 ‘김일성 장례식’ 때도 극심한 남·남 갈등을 겪은 바 있다. 재야세력과 학생운동권은 조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곳곳에 분향소를 설치한 반면 보수단체는 조문을 용납해선 안 된다고 반박하면서 볼썽사나운 혼란이 빚어졌다. 국력만 낭비한 부질없는 다툼이었다. 치밀한 전략에 의해 이뤄지는 조문외교는 국익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원칙없이 어정쩡하게 대응하다가는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킨다. 조문 문제에서부터 흔들리면 남북관계 새판짜기의 주도권을 잡는 것은 어림도 없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