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닮았다, 쓰나미다. 새집 헌집, 부자 거지, 교수 학생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쓸어버렸다. 왜? 이유가 없었다. 쓰나미 지나가는 길에 있었던 죄밖에.

222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땐 시민혁명이었다. 1789년 당시 프랑스 국민의 98%를 차지하고 있던 평민층의 대표들은 7월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해 2%의 기득권층이 지배하던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프랑스대혁명의 물꼬를 텄다.

앙시앵 레짐, ‘낡은 체제’란 뜻이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제1신분인 성직자, 제2신분인 귀족 그리고 제3신분인 평민의 3개 신분이 존재했다. 숫자로는 2%에 지나지 않던 성직자와 귀족들은 토지세, 종교세, 인두세, 소득세 등과 같은 각종 세금의 부과를 통해 사치와 쾌락을 향유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1786년 프랑스와 영국이 맺은 자유통상조약으로 영국의 값싼 상품이 유입되면서 프랑스 경제는 침체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고 왕실의 재정은 파탄 일보직전에 이르렀다. 이런 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왕정은 세제개편을 중심으로 한 경제개혁안을 논의하기 위해 3개 신분의 대표자들을 베르사유에 소집한다. 이 회의(삼부회)는 표결권에 대한 견해 차이로 파국을 맞고, 제3신분인 평민대표들이 이탈해 국민의회를 구성한다. 세력이 불어난 국민의회는 국왕의 무력진압에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 무장하기로 하고, 시민군으로 탈바꿈하면서 급기야 7월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함으로써 혁명의 횃불을 높이 올리게 된다.

무엇이 닮았을까. 2%의 가진 자에 분노하는 98%가 닮지 않았는가? 기득권층에 대해 냉소주의로 저항하는 서민들의 모습이 닮지 않았는가? 앙시앵 레짐과 보수꼴통이 닮지 않았는가? 민의를 수렴한답시고 소집한 회의가 파탄이 나면서 새로이 형성된 세력 쪽으로 힘이 급격히 쏠려가는 형국이 닮지 않았는가?

지금 우리 사회를 휘감고 있는 뭔가 수상쩍은 이 바람의 정체를 놓고 보수와 진보의 논객들이 갑론을박하고 있고, 잘나신 정치인들이 목숨을 건 진검승부를 펼친다.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 정체는 시민혁명이다. 우리 시민들은 노무현이라는 인물을 통해 ‘시민승리’의 단맛을 잠깐 느껴보았으나, 견고한 ‘구체제’의 벽에 부딪혀 이명박이라는 실용적 인물을 선택하는 ‘전향’을 했다. 그 전향에 대한 후회감과 자괴감이 얼마나 컸던지 이제는 논리를 따질 것도 없이 모든 체제를 부수려 하고 있다. 한나라당도 민주당도 아니다. 노무현도 이명박도 아니다. 그냥 밀어닥치고 있는 시민혁명의 쓰나미다.

200년 이상이 지난 지금 우리는 모두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을 근대민주주의의 탄생을 알린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한다. 왕권정치의 구시대를 청산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사회를 활짝 열어젖힌 쾌거였다고. 그러나 정작 대혁명 이후 10년의 기간은 단두대로 대표되는 처형과 학살, 내우와 외환, 공포정치와 쿠데타가 프랑스 전체를 휩쓴 극심한 혼란의 나날이었다. 수많은 지도자가 등장했다 처형되기를 반복한 리더십 부재의 시기였다. 결국 이 혼란의 10년은 코르시카 출신의 군인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통해 제1통령에 취임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대부분의 시민혁명은 처절한 배고픔과 뜨거운 열정의 융합반응에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얻는다. 냉철한 이성과 고결한 리더십이 이런 엄청난 에너지를 인도했다는 역사적 기록은 드물다.

대한민국의 2012년은 역사의 긴 강을 흐른 후에 우리 후손들에 의해 그 당시는 혼란스러웠지만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진통이었던 것으로 평가될 것인가? 아니면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성숙하고도 질서 있는 시민혁명을 이뤄낸 해로 기록될 것인가? 임진년에 우리를 찾아오는 흑룡을 맞이하는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경건해진다.

황영기 < 차병원그룹 부회장 / 객원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