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조선왕릉의 정자각 보물지정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문화재청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 40기(북한소재 2기 제외)의 정자각(丁字閣) 중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큰 세 곳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했다고 26일 밝혔다.
보물로 등재된 곳은 태조 이성계가 묻힌 건원릉(健元陵) 정자각(1741호)과 제 18대 현종과 그의 비가 묻힌 숭릉(崇陵) 정자각(1742호), 14대 선조와 그의 원비 의인왕후와 계비 인목왕후가 묻힌 목릉(穆陵)의 정자각(1743호)으로 모두 경기 구리 동구릉 경내에 있다.
정자각은 왕릉에서 제향하기 위해 봉분 앞에 지은 건물로, 공중에서 내려다본 평면 형태가 마치 한자 ‘丁’을 닮았다 해서 그렇게 이름붙여졌다.
건원릉 정자각은 태종 8년(1408) 건원릉을 조성할 때 같이 건립했다. 그 후 몇 차례 고치긴 했지만 조선왕조 국가 의례의 기본 법전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규정한 정자각 틀을 그대로 유지한 데다가 조선왕조 정자각의 표준이 된다는 점이 높이 평가됐다.
숭릉 정자각은 정전 5칸과 배위청 3칸을 합친 전체 8칸 규모이다. 정자각 건물로는 유일하게 팔작지붕이다. 이런 규모나 지붕 형식은 숙종 즉위년(1674) 당시 정자각 창건 때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보물 지정의 유력한 근거가 됐다.
목릉 정자각은 애초 광해군 즉위년(1608)에 건원릉 서쪽에 세워졌다가 지세가 좋지 않다는 이유 등으로 인조 8년(1630)에 건원릉 동쪽인 현재 위치로 이전됐다. 조선왕릉 정자각 중에서 유일한 다포형식 건물이라는 건축사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정자각을 포함한 동구릉 등 조선왕릉 40기(북한소재 2기 제외)는 2009년 6월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하지만 그 내부 건축물의 중심을 이루는 정자각에 대한 개별 문화재 지정은 이번이 처음이다.
왕릉 내부 건축물이나 석조물 중 지정 문화재는 효종이 묻힌 여주 영릉의 재실이 2007년 11월29일 보물 1532호로 이름을 올린 것이 현재까지 유일했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
보물로 등재된 곳은 태조 이성계가 묻힌 건원릉(健元陵) 정자각(1741호)과 제 18대 현종과 그의 비가 묻힌 숭릉(崇陵) 정자각(1742호), 14대 선조와 그의 원비 의인왕후와 계비 인목왕후가 묻힌 목릉(穆陵)의 정자각(1743호)으로 모두 경기 구리 동구릉 경내에 있다.
정자각은 왕릉에서 제향하기 위해 봉분 앞에 지은 건물로, 공중에서 내려다본 평면 형태가 마치 한자 ‘丁’을 닮았다 해서 그렇게 이름붙여졌다.
건원릉 정자각은 태종 8년(1408) 건원릉을 조성할 때 같이 건립했다. 그 후 몇 차례 고치긴 했지만 조선왕조 국가 의례의 기본 법전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규정한 정자각 틀을 그대로 유지한 데다가 조선왕조 정자각의 표준이 된다는 점이 높이 평가됐다.
숭릉 정자각은 정전 5칸과 배위청 3칸을 합친 전체 8칸 규모이다. 정자각 건물로는 유일하게 팔작지붕이다. 이런 규모나 지붕 형식은 숙종 즉위년(1674) 당시 정자각 창건 때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보물 지정의 유력한 근거가 됐다.
목릉 정자각은 애초 광해군 즉위년(1608)에 건원릉 서쪽에 세워졌다가 지세가 좋지 않다는 이유 등으로 인조 8년(1630)에 건원릉 동쪽인 현재 위치로 이전됐다. 조선왕릉 정자각 중에서 유일한 다포형식 건물이라는 건축사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정자각을 포함한 동구릉 등 조선왕릉 40기(북한소재 2기 제외)는 2009년 6월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하지만 그 내부 건축물의 중심을 이루는 정자각에 대한 개별 문화재 지정은 이번이 처음이다.
왕릉 내부 건축물이나 석조물 중 지정 문화재는 효종이 묻힌 여주 영릉의 재실이 2007년 11월29일 보물 1532호로 이름을 올린 것이 현재까지 유일했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