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zⓝCEO] 오원석 코리아에프티주식회사 대표 "기술도 인생도 늘 배워야 발전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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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석 대표 인터뷰
< 이 기사는 BizⓝCEO 기획특별판 입니다 >
한국 자동차 부품 산업의 ‘산 증인’ 코리아에프티㈜의 오원석 대표 사무실에는 여느 회장실처럼 많은 화초가 창가에 있고 결정을 기다리는 결재서류가 산적해있지만 특이한 점이 눈에 띄었다. 직장의 업무에 있어 가장 중요한 PC가 없었다.
이에 오원석 대표는 “직접 눈을 마주보며 결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전하는 아날로그파이다. 사람과의 대면을 중요시하는 그만의 스킨십 경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기술의 회사’ 코리아에프티를 일군 그는 전문성을 갖춘 글로벌 기업를 지향한다. 그는 “지속적이면서도 독자적 기술과 핵심산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한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실제로 코리아에프티의 R&D 투자는 연매출의 10%에 달한다.
코리아에프티를 역동적인 기업으로 키워낸 그는 젊은 시절부터 공대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조달청 공무원으로서 물자관리를 담당했던 부친의 조언 때문이었다.
‘나라가 잘 되려면 공대가 잘 되어야 한다’는 부친의 말을 마음에 새긴 20살 오원석 대표는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진학했고,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되겠다’는 신념으로 해외에서 연수 과정도 밟았다.
오 대표는 처음 직장에서는 설계실에서 발전설비를 위주로 설계를 담당했으며 한전계열사인 한국중공업으로 직장을 옮기는 대신 늘 안에서 속박되는 삶이 싫어 해외 플랜트 계열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태국의 발전소다. 태국 화력발전소는 큰 바지 위에 발전소를 지어서 옥포조선소에서 만들어 다 얹히고 오지 강어귀에 접안시키고 땅을 파서 고정시키는 작업이었다”고 설명했다.
오 대표는 “수주 당시 6500만불의 계약이었다”다며 “입찰 과정에서 기술이 한참이나 앞서 있던 일본을 이겨 더욱 고조된 분위기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터빈은 매우 정밀한 기계인데 거제도에서 태국까지 잘 갈 것인가”를 놓고 가슴 졸이던 기억을 아직도 가슴에 품으며 늘 연구 과제를 머리에 담아 두고 사는 진정한 공학자의 삶을 살고 있다.
코리아에프티는 내년 3월 상장을 앞두고 있다. 이에 대해 오 대표는 “이제 상장회사가 되면 제약이 많다. 전세계에 포진해있는 히든챔피언을 보면 연간 매출이 4000억이 넘는데 적어도 2015년까지는 그 수치가 근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사업이라는 것이 리스크가 있어야 이익도 있다”며 앞으로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적인 항해를 계속할 것임을 전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라며 인생을 학습의 연속으로 표현하는 오 대표는 앞으로도 코리아에프티를 전문적이면서도 글로벌한 기업으로 성장시킬 예정이다.
양승현 기자 yangsk@hankyung.com
한국 자동차 부품 산업의 ‘산 증인’ 코리아에프티㈜의 오원석 대표 사무실에는 여느 회장실처럼 많은 화초가 창가에 있고 결정을 기다리는 결재서류가 산적해있지만 특이한 점이 눈에 띄었다. 직장의 업무에 있어 가장 중요한 PC가 없었다.
이에 오원석 대표는 “직접 눈을 마주보며 결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전하는 아날로그파이다. 사람과의 대면을 중요시하는 그만의 스킨십 경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기술의 회사’ 코리아에프티를 일군 그는 전문성을 갖춘 글로벌 기업를 지향한다. 그는 “지속적이면서도 독자적 기술과 핵심산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한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실제로 코리아에프티의 R&D 투자는 연매출의 10%에 달한다.
코리아에프티를 역동적인 기업으로 키워낸 그는 젊은 시절부터 공대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조달청 공무원으로서 물자관리를 담당했던 부친의 조언 때문이었다.
‘나라가 잘 되려면 공대가 잘 되어야 한다’는 부친의 말을 마음에 새긴 20살 오원석 대표는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진학했고,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되겠다’는 신념으로 해외에서 연수 과정도 밟았다.
오 대표는 처음 직장에서는 설계실에서 발전설비를 위주로 설계를 담당했으며 한전계열사인 한국중공업으로 직장을 옮기는 대신 늘 안에서 속박되는 삶이 싫어 해외 플랜트 계열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태국의 발전소다. 태국 화력발전소는 큰 바지 위에 발전소를 지어서 옥포조선소에서 만들어 다 얹히고 오지 강어귀에 접안시키고 땅을 파서 고정시키는 작업이었다”고 설명했다.
오 대표는 “수주 당시 6500만불의 계약이었다”다며 “입찰 과정에서 기술이 한참이나 앞서 있던 일본을 이겨 더욱 고조된 분위기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터빈은 매우 정밀한 기계인데 거제도에서 태국까지 잘 갈 것인가”를 놓고 가슴 졸이던 기억을 아직도 가슴에 품으며 늘 연구 과제를 머리에 담아 두고 사는 진정한 공학자의 삶을 살고 있다.
코리아에프티는 내년 3월 상장을 앞두고 있다. 이에 대해 오 대표는 “이제 상장회사가 되면 제약이 많다. 전세계에 포진해있는 히든챔피언을 보면 연간 매출이 4000억이 넘는데 적어도 2015년까지는 그 수치가 근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사업이라는 것이 리스크가 있어야 이익도 있다”며 앞으로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적인 항해를 계속할 것임을 전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라며 인생을 학습의 연속으로 표현하는 오 대표는 앞으로도 코리아에프티를 전문적이면서도 글로벌한 기업으로 성장시킬 예정이다.
양승현 기자 yangs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