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군부에 둘러싸인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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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식 정치부 차장 yshong@hankyung.com
노무현 정부 시절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회의에 참여했던 한 전직 고위 경제 관료의 회고다.
그는 2006년 남북을 연결하는 경의선 공사 지원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 회담에 임하는 북측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 못했다. 철도 건설에 필요한 자재 지원을 협의하기 위한 자리였는데, 북측은 회담 주제에 벗어난 요구사항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더 이해 못한 것은 서울의 태도였다. 웬만하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라는 지시가 청와대에서 왔다. 그는 “정권 핵심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고 털어놨다.
2000년 6·15 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 상봉, 장관급 회담 등 이어지는 ‘남북 관련 이벤트’ 로 한반도는 숨가쁘게 돌아갔고, 대북 지원책이 쏟아졌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대북 지원 규모는 69억달러에 달한다. 그럼에도 회담 때마다 주도권은 도움을 받는 북측이 쥐었다. 북측은 걸핏하면 회담장을 제멋대로 박차고 나갔다. 남측은 마냥 기다렸다가 북측이 새벽에라도 회담을 하자면 아무 불만 없이 따르는 패턴이 이어졌다.
北 '장단'에 춤춘 남북관계
예외는 있었다. 2001년 11월 금강산에서 열린 6차 장관급 회담 당시 홍순영 통일부 장관은 ‘9·11 테러’와 관련해 비상경계태세를 취한 남측을 비난하는 북측에 대해 쓴소리를 하고 회담 결렬을 선언했다. 그런데 결과는 홍 장관 경질이었다. 햇볕정책에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는 게 그 배경이었다. 통일부 장관의 운명은 북한이 쥐락펴락한다는 불만이 통일부 내에서 팽배했다. 북한은 받을 건 받으면서도 핵 실험과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며 국제사회를 위협했다. 강경책 뒤엔 항상 군부 세력이 있었다. 실무선에서 합의해도 북한 군부가 틀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김정일 영결식 과정은 북한이 변한 게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줬다. 후계자 김정은은 여전히 강경 군부에 둘러싸여 있다. 김정일 영구차를 호위했던 8명 가운데 군인 직함을 갖지 않은 사람은 최태복 김기남 노동당 비서밖에 없다.
북에 또 '꽃놀이패' 안겨주나
특히 김영철 정찰총국장은 대남 ‘매파 중 매파’로 꼽힌다. 2008년 12월 개성공단에 내려와 남측 입주기업 대표들을 모아놓고 “개성공업지구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 경제는 정치 앞에 있지 않다”고 큰 소리를 쳤다. 그는 천안함 도발을 일으킨 숨은 세력으로 알려졌다. 김정은 체제 최고 실세로 등극한 이영호 총참모장은 포병 병과 출신으로 연평도 포격 도발을 주도했다.
김정일 사후 한반도 주변국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북한에 먼저 다가가기 경쟁을 벌이는 듯한 모양새다. 대북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셈법이 자리하고 있다. 중국을 필두로 한국 미국이 재빠르게 김정은 체제를 인정했다. 6자회담을 열기 위해 한·미·중은 연쇄 접촉에 들어갔다.
우리 정부는 김정은 체제가 어떤 대남 전략을 취할지 일언반구도 없는 상황에서 이미 ‘유연성 있는 대북 정책’을 먼저 천명했다. 상대의 패를 보기 전에 우리의 패를 먼저 보여준 것이다. 자칫 북한의 위상만 높여줘 그들에게 ‘꽃놀이 패’를 주는 꼴이 아닌지 우려된다. 내달 1일 북한의 공동사설이 나온 뒤 2일엔 이명박 대통령의 특별연설이 예정돼 있다. 김정은 체제에선 도움을 받는 쪽이 큰 소리 치는 구조를 만들어선 안 된다.
홍영식 정치부 차장 yshong@hankyung.com
그는 2006년 남북을 연결하는 경의선 공사 지원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 회담에 임하는 북측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 못했다. 철도 건설에 필요한 자재 지원을 협의하기 위한 자리였는데, 북측은 회담 주제에 벗어난 요구사항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더 이해 못한 것은 서울의 태도였다. 웬만하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라는 지시가 청와대에서 왔다. 그는 “정권 핵심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고 털어놨다.
2000년 6·15 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 상봉, 장관급 회담 등 이어지는 ‘남북 관련 이벤트’ 로 한반도는 숨가쁘게 돌아갔고, 대북 지원책이 쏟아졌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대북 지원 규모는 69억달러에 달한다. 그럼에도 회담 때마다 주도권은 도움을 받는 북측이 쥐었다. 북측은 걸핏하면 회담장을 제멋대로 박차고 나갔다. 남측은 마냥 기다렸다가 북측이 새벽에라도 회담을 하자면 아무 불만 없이 따르는 패턴이 이어졌다.
北 '장단'에 춤춘 남북관계
예외는 있었다. 2001년 11월 금강산에서 열린 6차 장관급 회담 당시 홍순영 통일부 장관은 ‘9·11 테러’와 관련해 비상경계태세를 취한 남측을 비난하는 북측에 대해 쓴소리를 하고 회담 결렬을 선언했다. 그런데 결과는 홍 장관 경질이었다. 햇볕정책에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는 게 그 배경이었다. 통일부 장관의 운명은 북한이 쥐락펴락한다는 불만이 통일부 내에서 팽배했다. 북한은 받을 건 받으면서도 핵 실험과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며 국제사회를 위협했다. 강경책 뒤엔 항상 군부 세력이 있었다. 실무선에서 합의해도 북한 군부가 틀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김정일 영결식 과정은 북한이 변한 게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줬다. 후계자 김정은은 여전히 강경 군부에 둘러싸여 있다. 김정일 영구차를 호위했던 8명 가운데 군인 직함을 갖지 않은 사람은 최태복 김기남 노동당 비서밖에 없다.
북에 또 '꽃놀이패' 안겨주나
특히 김영철 정찰총국장은 대남 ‘매파 중 매파’로 꼽힌다. 2008년 12월 개성공단에 내려와 남측 입주기업 대표들을 모아놓고 “개성공업지구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 경제는 정치 앞에 있지 않다”고 큰 소리를 쳤다. 그는 천안함 도발을 일으킨 숨은 세력으로 알려졌다. 김정은 체제 최고 실세로 등극한 이영호 총참모장은 포병 병과 출신으로 연평도 포격 도발을 주도했다.
김정일 사후 한반도 주변국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북한에 먼저 다가가기 경쟁을 벌이는 듯한 모양새다. 대북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셈법이 자리하고 있다. 중국을 필두로 한국 미국이 재빠르게 김정은 체제를 인정했다. 6자회담을 열기 위해 한·미·중은 연쇄 접촉에 들어갔다.
우리 정부는 김정은 체제가 어떤 대남 전략을 취할지 일언반구도 없는 상황에서 이미 ‘유연성 있는 대북 정책’을 먼저 천명했다. 상대의 패를 보기 전에 우리의 패를 먼저 보여준 것이다. 자칫 북한의 위상만 높여줘 그들에게 ‘꽃놀이 패’를 주는 꼴이 아닌지 우려된다. 내달 1일 북한의 공동사설이 나온 뒤 2일엔 이명박 대통령의 특별연설이 예정돼 있다. 김정은 체제에선 도움을 받는 쪽이 큰 소리 치는 구조를 만들어선 안 된다.
홍영식 정치부 차장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