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세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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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2004년 봄 투병중이던 중년 시인이 버스 타고 오지를 지나다가 외딴집 흙담에 매달려 흔들리는 시래기를 봤다. 지금까지 해온 짓들이 누추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보잘 것 없는 시래기도 허기진 사람들에겐 따뜻한 죽이 된다. 이러다간 누군가에게 시래기죽 한 그릇도 못되는 게 아닌가”하는 반성이었다. 병상에서 생각을 가다듬어 유언처럼 시를 쓴 후 시인은 세상을 떴다. ‘곰삭은 흙벽에 매달려/찬바람에 물기 죄다 지우고/배배 말라가면서/그저, 한겨울 따뜻한 죽 한 그릇 될 수 있다면.’(윤중호 ‘시래기’)
저마다 잘난 체 살아가지만 누군가의 시래기죽 한 그릇 되는 것은 간단치 않다. 물기를 지운다는 건 우리 몸에 속속들이 배어 있는 허세와 욕심을 덜어내고, 평상심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배운 것, 가진 것 많지 않지만 의연하게 평생을 살아낸 노모(老母)의 깨달음 같은 것이다.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싸우지 말고 살아라/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이정록 ‘의자’)
대개의 영화에서 끝이 다가오면 장면은 짧아지고 이야기 전개는 빨라진다. 세월도 그렇다. 연초 사소한 일들조차 낱낱이 살아서 느릿느릿 움직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루하루가 엔딩 자막 오르듯 빠르게 물러나며 사라져 간다. 톨스토이는 “한 해의 마지막에 처음보다 나아진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큰 행복”이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그럴 수 있는 이는 흔치 않다. 하지만 산에 오를 때가 아니라 혼곤하게 지쳐 내려올 때에야 얻는 깨우침도 있다. ‘내려갈 때/보았네/올라갈 때/보지 못한/그 꽃.’ (고은 ‘그 꽃’)
어느덧 세밑이다. 유럽 재정위기와 실업, 인플레가 쉴 틈 없이 우리 경제를 짓눌렀다. 정치는 이념과 원칙에서 이탈해 포퓰리즘의 덫에 빠져버렸다. 20대 후계자가 이어받은 북한은 어느 때보다도 불안해 보인다. 내년도 호락호락하지 않으리라. 그래도 각자 서 있는 곳에서 충실하게 살다 보면 시련은 보람과 기쁨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이제 지는 해를 향해 서서 가슴을 쓸어내릴 때다/그래도 우리는 무사했으니/혼돈 속에서도 많은 것을 이룩하고/많은 것을 쌓았으니/지는 해를 향해 서서 다시 한번 생각할 때다….’(신경림 ‘아름다운 손들을 위하여’)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저마다 잘난 체 살아가지만 누군가의 시래기죽 한 그릇 되는 것은 간단치 않다. 물기를 지운다는 건 우리 몸에 속속들이 배어 있는 허세와 욕심을 덜어내고, 평상심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배운 것, 가진 것 많지 않지만 의연하게 평생을 살아낸 노모(老母)의 깨달음 같은 것이다.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싸우지 말고 살아라/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이정록 ‘의자’)
대개의 영화에서 끝이 다가오면 장면은 짧아지고 이야기 전개는 빨라진다. 세월도 그렇다. 연초 사소한 일들조차 낱낱이 살아서 느릿느릿 움직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루하루가 엔딩 자막 오르듯 빠르게 물러나며 사라져 간다. 톨스토이는 “한 해의 마지막에 처음보다 나아진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큰 행복”이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그럴 수 있는 이는 흔치 않다. 하지만 산에 오를 때가 아니라 혼곤하게 지쳐 내려올 때에야 얻는 깨우침도 있다. ‘내려갈 때/보았네/올라갈 때/보지 못한/그 꽃.’ (고은 ‘그 꽃’)
어느덧 세밑이다. 유럽 재정위기와 실업, 인플레가 쉴 틈 없이 우리 경제를 짓눌렀다. 정치는 이념과 원칙에서 이탈해 포퓰리즘의 덫에 빠져버렸다. 20대 후계자가 이어받은 북한은 어느 때보다도 불안해 보인다. 내년도 호락호락하지 않으리라. 그래도 각자 서 있는 곳에서 충실하게 살다 보면 시련은 보람과 기쁨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이제 지는 해를 향해 서서 가슴을 쓸어내릴 때다/그래도 우리는 무사했으니/혼돈 속에서도 많은 것을 이룩하고/많은 것을 쌓았으니/지는 해를 향해 서서 다시 한번 생각할 때다….’(신경림 ‘아름다운 손들을 위하여’)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